“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문구다. 그런데 ‘왜 아버지가 날 낳지?’라는 의문이 든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지, 아버지가 낳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한번 더 생각해보면 ‘여기에도 나름대로 사연이 있겠구나!’ 미루어 짐작게 된다.
예전에는 천자문(千字文) 추구집(推句集ㆍ시구 모음집)과 더불어 가장 먼저 배우는 책이 ‘사자소학’(四字小學)이었다. 이 사자소학의 첫 구절이 바로 ‘부생아신(父生我身) 모국오신(母鞫吾身)’으로, 위 해석 글과 같다. 천자문의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과 유사한 위치라고나 할까? 참고로 추구집의 가장 유명한 문구는 TV광고에서 안중근 의사의 말로 오인된 ‘일일부독서(一日不讀書) 구중생형극’(口中生荊棘)으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뜻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버지가 낳는다’는 것은 성씨의 계승을 의미한다. 즉 부계씨족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부위자강’(父爲子綱)이나 ‘부자유친’(父子有親)' 같은 삼강오륜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동아시아의 부계 계승은 제사를 통해 강조된다. 유교의 제사는 같은 성씨 남성들의 웃어른에 대한 의례다. 제수(祭需)는 며느리가 준비하고, 정작 제사는 동성(同姓)의 남성들만 지내는 불평등한 상황이 존재하는 구조다. 즉 제사는 ‘혈통 계승’과 ‘효에 입각한 치사랑 강조’를 정당화하는 유교의 종교 의례라는 말씀.
오늘날에야 제사에서 소외되는 것이 무슨 문제겠는가! 그러나 과거엔 제사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공동체의 정회원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요즘으로 치면 투표권이 없는 정도랄까?!
2,000년 전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파되면서, 유교의 ‘그들만의 제사 문화’에 충격을 던진다. 붓다는 계급 평등과 남녀평등을 주장했다. 더 나아가 불교에는 ‘부계 효’보다도 ‘모계 효’를 강조하는 전통이 있다.
불교에는 당연히 유교의 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효 의식’과 ‘재계(齋戒)를 통한 추모 의례’는 존재했다. 이를 종합한 것이 음력 7월 15일의 우란분재(盂蘭盆齋)다. 우란분이란,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말로, 죽은 이가 고통받는 상황을 나타낸다. 이는 붓다의 제자인 목련이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구원한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우란분재는 우란분절(節)이라고도 한다. 동아시아의 고·중세는 불교가 주도했는데, 그 기간이 1,000년이 넘는다. 그런데 ‘명절’로 편입되는 것은 불탄절(부처님오신날), 성도절(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날), 우란분절뿐이다. 이는 동아시아의 조상숭배 문화 속에서의 부족한 부분을 우란분재가 잘 보완했기 때문이다.
우란분절을 통해서, 여성도 돌아가신 분에 대한 추모가 공식적으로 가능해진다. 또 과거에는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는데, 후손에 대한 추모도 가능하게 됐다. 이는 우란분절의 정립에서 매우 크게 작용했다. 유교에서는 치사랑만 강조했기 때문에 부모는 ‘앞세운 자식’의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이러한 민중의 요구를 불교가 해소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불교는 평등을 주장하기 때문에 직계가 아닌 삼촌이나 고모·이모 및 친구나 친척까지 나와 친밀했던 모든 이들의 추모를 허용했다. 이는 불교의 재계는 제사가 아닌 추모와 천도 의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기에는 유교의 제사가 자시(오후 11시~오전 1시)에 지내는 밤 문화인 것과 달리, 우란분재는 사시(오전 9∼11시)에 올리는 낮 문화인 점도 작용한다. 이는 다양한 사람의 참여가 쉬운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제사 등 종교 의례가 해체되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고마운 분들에 대한 추모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 유지될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 널리 모든 이를 추모하는 불교의 우란분절이 존재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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