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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된 '레즈'의 사랑과 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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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의 6년차 교사 빌 존스(Bill Jones)가 1968년 남자 아이를 입양했다. 독신 동성애자였던 그는 남들처럼 가족을 원했고, 히피와 성(性)혁명의 서부에는 가정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동성애자는 연애도 안 되고 결혼은 더 안 되고 입양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법이 아니라 사회관습이, 근년의 미심쩍은 표현을 빌자면 ‘국민적 공감대’가 대체로 그러했다. 첫 관문은 입양 희망자를 면접해 적합성을 심사하는 사회복지사였다.
존스는 운이 좋았다. 그의 사회복지사는 이렇게 말했다. “동성애자도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입양위원회 생각은 나랑 다를 거예요. (당신이든 누구든) 동성애자가 입양을 원한다면 내게 동성애자란 사실을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존스가 마음을 준 아이는, 다섯 번이나 파양된 적이 있는 애런(Aaron)이었다. 약물 중독자 여성에게서 태어난 애런은 ‘금단 증상’처럼 보이던, 실제로는 ‘양극성 장애’ 증상을 겪는 아이였다. 존스 역시 그래서 머뭇거렸다. “아이들은 거절당하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는 걸 아는 그였기에, 스스로 부끄럽고 아이에게 미안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망설이던 어느날 그는 곰인형을 사들고 입양기관에 찾아가 애런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애런이 제 목소리를 듣곤 방을 가로질러 달려오더니 제 다리를 두 팔로 감싸 안았어요. 저는 그냥 울었죠.” 그와 애런은 69년 2월 13일 발렌타인 데이 전날에 가족이 됐다. 둘은 서른 살 애런이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숨질 때까지 함께 했다.
빌 존스는, 알려진 바 아이를 입양한 미국 최초 동성애자다. 2015년 NPR 인터뷰서 그는 “하루하루가 그와의 싸움이었지만 애런은 사랑스럽고 다정한 아이였다”고, “결코 단 한 번도 입양을 후회한 적 없었다”고 말했다. “저는 그를 정말 사랑했고, 그도 저를 사랑했어요. 저는 여러모로 운이 좋았어요.”
워싱턴주 시애틀의 주부 매들린 아이작슨(Madeleine Isaacson)과 샌디 슈스터(Sandy Schuster)는 1970년 마을 교회에서 처음 만났다. 교회 주일교사 아이작슨의 제자 중 한 명이 슈스터의 아들이었다. 각자 아이를 낳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견디던 둘은 이듬해 6월 동시에 이혼을 감행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함께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회는 그들을 쫓아냈다. 더 문제는 둘의 자녀 6명의 양육권이었다. 둘은 소송을 걸었다. 73년 법원은 두 엄마의 양육권을 각각 인정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따로 살아야 한다’는 거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해 다큐멘터리(Sandy and Madeleine’s Family)로도 만들어졌다.
둘은 각자 맞은편 아파트를 임대해 사실상 동거했고, 여섯 아이들은 서로를 언니 누나라 부르며 공동가정을 이뤘다. 그러자 재혼한 전 남편들이 ‘조건 위반(겸 법원 명예훼손)’이라며 다시 양육권 반환소송을 걸었다. 긴 재판 끝에 78년 미 연방대법원은 “자녀 복지에 관한 한 재판부는 양육권자에게 광범위한 재량권을 부여해야 한다”며 둘의 생활 방식이 “피고들의 개인적 편의 때문에 아이들의 최선의 이익에 반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그해 미국 최초로 뉴욕주가 동성애자의 입양 신청 자격을 인정했다.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레즈비언 커플 셰리 파이스(Cheri Pies, 1949.11.26~ 2023.7.4)와 멜리나 린더(Melina Linder)가 여자 아이를 입양한 것도 78년 그해였다.
하지만, 법과 사회적 편견은 그러려니 하더라도, 동성애자 커플이 아이를 키우는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의료나 교육을 비롯해 그들이 기댈 만한 사회제도는 전무했고, 도움을 청할 만한 경험자도 없었다. 미국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 보건교육 및 상담가로 일하던 파이스에게도,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고 유치원에 보낼 일 등 모든 게 아득하고 막막했다. 그는 젊은 이성애자 (예비)산모들과 해온 것처럼 새 모임을 꾸렸다. 아이를 원하는 레즈비언들끼리 모여 각자 문제를 공유하고 정보를 나누며 해법을 모색하자는 취지였다. 그는 여성들이 많이 찾는 서점 등에 모임을 알리는 전단지를 붙였다. 그렇게 78년 가을, 파이스 커플의 집 거실에 25명이 처음 모였다.
그들의 워크샵 소식은 게이 커뮤니티 네트워크 등을 통해 점차 미국 전역에 알려졌고, 80년대 초반 무렵에는 정자 기증자를 구하는 방법 등 정보와 도움을 청하는 전화와 편지가 쇄도했다.
파이스는 자신의 경험과 워크샵 성과물들, 즉 레즈비언들의 부모되기의 시작과 과정의 난제와 해법, 정보 등을 정리해 84년 말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출판사(Spinsters Ink)를 통해 ‘부모 되기: 레즈비언들을 위한 학습장(Considering Parenthood: A Workbook for Lesbians)’이란 책을 출간했다. 자녀를 꿈꾸는 레즈비언들을 위한 인류 최초 실용서이자 희망의 빛이었다.
셰러미 “셰리” 파이스(Cheramy “Chery” A. Pies)는 LA의 외과 개업의와 간호사 부부의 세 딸 중 둘째로 태어났다. 반전-인권운동이 한창이던 67년 UC버클리에 입학해 71년 졸업(사회과학 전공)한 뒤 가족계획연맹에서 일했고, 보스턴대와 UC버클리에서 각각 사회사업학(76)과 모자보건학(85) 석사를, 93년 UC버클리 공중보건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80년대 말부터 콘트라코스타(Contra Costa) 카운티 모자보건국장을 지냈고, 버클리대 겸임교수를 거쳐 2017년 은퇴할 때까지 교수로서 강의했다. 그의 주전공은 ‘생애과정이론(Life Course Theory)’이었다. 생애과정이론은 개인의 생애를 본인의 선택-이력 뿐 아니라 사건과 정책 등 거시적, 시대-사회적 배경과 함께 파악해야 한다고 본, 70년대 미국서 태동한 사회과학방법론 겸 이론. 사회학과 심리학 경제학은 물론이고 범죄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저 패러다임에서 파이스가 초점을 맞춘 것은 물론 자신이 경력을 쌓아온 사회보건, 특히 모자 보건이었다.
그는 오바마 행정부 모자보건국장을 지낸 현 UC버클리 공중보건대학장 마이클 루(Michael C. Lu)와 함께 빈민지역 어린이 보건프로젝트(Best Babies Zone Initiative)를 시작해 근년 9개 커뮤니티로 확산시켰다. 지난 4월 버클리대 공중보건대학원 웹진 인터뷰에서 그는 “대규모 정책을 통해 구조적 인종차별 등을 개선하려는 이들이 있지만, 베스트 베이비스 존은 그런 정책 변화를 기다릴 수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소규모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는 프로젝트라고 소개했다. 그는 “아기는 광산의 카나리아 같은 존재”라며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 지역사회는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도 말했다
파이스가 보건 관료로 또 학자로 제 삶을 사는 동안, 세상에는 ‘부모되기’에 성공한 동성애자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동성애자 자녀 친권- 입양에 대한 법원의 태도도 사회적 인식도 조금씩 진화했다. 레즈비언 여성 파트너의 친자녀를 비친모인 파트너가 입양할 수 있다는 법원 판결(85)이 나왔고, 88년엔 성소수자 부모를 둔 청소년단체가 훗날 전국조직(‘레즈비언과 게이의 자녀들', COLAGE)로 성장하게 된 가족평등조직을 꾸렸다. 레즈비언 부부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담은 레슬레아 뉴먼(Leslea Newman)의 동화 ‘헤더에게는 엄마가 둘이야(1989)’가 출간됐다. 93년 버몬트주와 매사추세츠주가, 97년 뉴저지주가 각각 동성커플의 자녀 공동입양을 합법화했다.
96년 11월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게이 가족의 커밍아웃(Gay Families Come Out)’이란 제목의 특집 기사를 실었다. 기사는 자녀를 둔 다양한 게이 가정을 소개하며, 당시 한 명 이상 게이 부모를 둔 미국 아동의 수가 600만~1,4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뉴스위크는 “입양기관들은 스스로 게이라고 밝힌 예비 부모 특히 남성들의 문의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밝혔고, 정자은행들은 레즈비언들이 주도하는 ‘게이비 붐(gayby boom)’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성인 응답자의 57%가 ‘동성애자도 이성애자 못지않게 육아를 잘 할 수 있다’고 답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소개했다. 동성애자 커플이 입양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답한 응답자도 전체의 36%로, 2년 전의 29%보다 높아졌다.
10년 뒤인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가족의 날(9월 28일)’을 선포하며 “아이의 양육 주체가 양(兩)부모든 한부모든 조부모든 동성커플이든 후견인이든, 모든 가족은 우리가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하고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라고 선언했다. 이듬해에는 한 레즈비언 커플의 안타까운 사연(Janice Langbehn and Lisa Marie Pond)을 계기 삼아, 가족에 한해 허용되던 환자 면회객 명단에 환자가 직접 동성 파트너를 지정해 포함시킬 수 있게 했다. 미 국무부가 여권 신청서 양식의 어머니와 아버지 항목을 ‘어머니 또는 부모 1’ ‘아버지 또는 부모 2’ 로 변경한 것은 2011년이었다.
물론 결정적인 분수령은 2015년 미연방대법원의 동성혼 법제화(Obergefell v. Hodges)였다. 법적 동성부부는 이제 이성부부와 동등한 혜택과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고, 거기에는 당연히 입양 권리도 포함됐다. 마지막까지 동성애자 입양을 금지하던 미시시피주도 이듬해 관련법과 정책을 폐지했다.
하지만 동성애자 자녀 입양에 대한 제도적 차별과 불이익이 주법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동심리학회 등의 다양한 연구들이 여러 차례 반박했지만 여전히 게이 부부가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편견은 남아 있다. 그런 이들이 입양관련 기관에서 은밀히 행하는 물증 없는 차별도 적지 않을 것이다.
2020년 미 인구조사(CPS)에 따르면, 2019년 현재 미국의 110만 동성커플 중 14.7%가 한 명 이상의 18세 미만 자녀를 두고 있다.(이성커플은 37.8%) 숫자로는 약 29만2,000명이었다.
양육 주체가 누구든, 한부모든 동성커플이든,
가족은 우리를 격려하고 성취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다.”
2019년 9월,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저 거대한 변화의 처음에 파이스의 워크샵이 있었고 이제는 더 진전된 내용을 담은 책들에 밀려 절판된 그의 책이 있었다. 동료 교수인 로리 도프먼(Lori Dorfman)은 “셰리의 노력 덕분에 ‘그래,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가족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게 된 이들, 새로운 세상을 갖게 된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파이스의 워크샵을 통해 정자 기증자를 소개받은 질 로즈(Jill Rose)의 가족, 즉 그와 아들과 며느리와 두 명의 손자가 그 예다. 로즈는 파이스를 아들-손자들의 ‘명예 대모’라 여겼다. 파이스의 아내 린더는 뉴욕타임스 전화 인터뷰에서 “셰리와 나는 세상 어디서나, 뉴질랜드에서 하이킹을 하거나 버클리 힐을 산책하다가도 그에게 다가와 고마움을 전하는 이들, 당신이 없었다면 벤도 앨리스도 또 누구도 그들의 삶에 없었으리라 말하는 이들을 만나곤 했다”고 말했다.
파이스는 2023년 4월 인터뷰에서 “내게 멘토링은 나로 하여금 전문가가 되게 한 근간이었다(…) 나는 내 학생들과 친구들, 이웃과 젊은이들을 더 나은 길로 이끄는 게 좋았다”고 말했다. 그를 이끈 것도 수많은 멘토들이었다. 84년 책 서문에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보다 앞서 수많은 레즈비언 어머니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롤모델도 없이 어려운 고비들을 넘었던 그들이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을 열었고, 우리는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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