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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적 남성성 유통기한 지났는데… '멋진 차 모는 능력남' 끈질긴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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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는 흉기난동과 모방범죄로 뉴스를 보기조차 어려운 요즘이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8월 11일 기준 전국에서 ‘살인예고’ 게시물 315건을 적발해 작성자 119명을 검거했다. 이런 지경이다 보니 교육을 하러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친구를 만나러 번화가에 가다가도 문득 이곳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한 마음과 함께, 탈출구를 찾아 두리번거리게 된다. ‘치안강국’이라 자부하던 목소리는 쏙 들어가고 호신용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도시 곳곳에 경찰들이 배치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안전할까? 당장 나는 호신술은 1도 모르고 문제는 물처럼 자꾸 빈 곳을 찾아 흐르는데, 이대로 정말 괜찮을까?
CCTV 확충, 처벌 강화도 어떤 지점에서는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그에 앞서 범죄를 예방할 수는 없을까? 범죄 가해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따져 물어보다 보면 범죄 예방의 실마리가 보일지 모른다. 그런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하나 있다. 바로 성별이다. 검찰청 범죄분석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2021년 살인범죄의 가해자 81%, 강도의 86.9%, 방화의 82.4%, 폭행의 80.3% 성별은 남성이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2014년 발표된 ‘묻지마 범죄자의 특성 이해 및 대응방안 연구’에 따르면 ‘묻지마 범죄’ 가해자 48명 중 47명이 남성이었고 일본 법무성에서 2013년 발표한 ‘무차별 살상사범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52명 중 51명이 남성이었다. 이 외에 어떤 자료를 보더라도 세계 어디에서나 남성들이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른다. 당장 이런 현실 아래 남성으로 살아가면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 말라”는 말보다 영양가 있는 무엇을 더 해 볼 수는 없을까?
남성성에 대한 고찰로 이런 사태를 살펴보는 것은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한국의 남성성은 어떤 상황일지 살펴보자.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성불평등과 남성의 삶의 질에 관한 연구(2018)’에 따르면 기존 전통적 남성성 규범으로 여겨지는 ‘가족의 생계 책임은 남자에게 있다’에 20대 남성 41.3%가 비동의하는 모습을 보였고, ‘상관에게 복종해야 한다’에는 56.8%가, ‘힘든 일 있어도 내색하지 말아야 한다’에는 62.6%가 비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외에도 ‘성적 능력·물리적 힘’, ‘경쟁과 성공’ 등 ‘전통적 남성성’ 규범에 대한 동의 정도 역시 연령대가 낮을수록 더 낮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연구 자료에 따르면 지금 우리 사회 남성성은 변화의 과도기에 놓여 있다. 이 말인즉, ‘남자라면 자고로…’라는 말로 시작되는 많은 훈계조의 이야기가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성 역할 고정관념에 비판 어린 목소리를 높여왔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변화가 반가우면서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내 주변 남성들 중, 4인 가족을 혼자 벌어 먹여살리겠다는 꿈같은 소리를 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당장 맞벌이로 함께 몇 년을 일해도 집을 구할 수 없어 자녀 갖기를 기꺼이 포기하는 세상에 그런 1인 생계부양자 모델은 이제 신화로서의 의미를 잃은 지도 오래다. 그럼 이렇게 전통적 남성성 규범이 힘을 잃은 자리는 어떻게 대체되고 있을까?
성평등한 새로운 남성성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들려오면 좋겠건만, 현실은 그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우월한 경제력과 신체 능력을 매력적인 남성의 모습으로 이야기하고 다른 대안 모색에는 게으르다. 단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연애 예능만 봐도 그렇다. 청년언론 '고함20'에서는 '하트시그널의 여자들은 운전하지 않는다'는 기사로 연애 예능에서 나타나는 성 역할 고정관념을 꼬집었다. 어차피 자동차는 협찬임에도 주구장창 남성만 운전하는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너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주차권을 입에 물고 한 손으로 폭풍 후진하는 남성을 멋있게 그려내니까. 이는 적극적인 신체 능력과 자동차를 운용할 수 있는 경제력이 남성성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과 기대의 괴리 사이에서 청년 남성들은 대안을 모색하기보다 성차별적인 인식을 거듭 학습해가고 있는 듯 보인다. 실로 앞서 언급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성별 규범을 거부하는 여성에 대한 반감을 가진 적대적 성차별주의 성향이 30대 38.7%, 20대 50.5%로 다른 세대 남성보다 작게는 두 배에서 크게는 다섯 배까지 높게 나타난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 보면, 기존의 전통적 남성성 규범에 동의하지 못하는 청년 남성들은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적인 기대는 크게 변하지 않고 있으며 동시에 적대적 성차별주의 성향의 청년 남성 역시 늘어나고 있다.
인터넷 용어 중 ‘트롤링’이라는 말이 있다. 타인을 화나게 만들기 위해 악행을 일삼으며 폭주하는 행위를 뜻한다. 협업을 강조하는 온라인 게임을 하다 보면 꼭 이런 트롤러(트롤링하는 사람)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들은 대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도 아주 적극적으로 게임을 망치려고 한다. 욕먹는 건 기본이거니와 팀의 승리나 개인의 승률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게임의 재미까지 모두 앗아가버리고 마는 도무지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이지만 이런 경우가 결코 드물지 않다. 그리고 이런 모습에서 이상한 기시감을 느낀다. 바로 앞서 언급한 무차별적 흉기난동 사건에서 자신의 불행을 핑계 삼아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기존 가부장 권력을 획득하기는 사회경제적으로 나날이 어려워지지만 여전히 그런 모습을 이상적으로 여기는 문화는 바뀌지 않고 그 안에서 대안을 모색하거나 현실을 분석할 언어마저 부재한 상황에서 어떤 개인은 트롤링을 자신의 선택지에 둔다. 애초에 가부장이라는 목표 달성은 글렀으니 어떻게든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듯 공멸로 이끌어가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분석을 두고 청년 남성이 불쌍하다던가, 구제불능이라는 식의 이야기 말고 무엇을 더 해 볼 수는 없을까? ‘단군 이래 최대 스펙’을 가졌지만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은 지금 청년세대를 관통하는 각박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현실이 성별을 막론한 모든 청년세대에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음에도 왜 어떤 청년 남성들의 선택지는 그토록 폭력적인지 물어야 한다. 청년 여성들은 그와 같거나 심지어 그보다 더 열악하고 차별적인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그저 트롤링으로 모든 것을 망치려 작정하기보다 맞닥뜨린 차별적이고 문제적인 현실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냈다. 바로 페미니즘이다. 청년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통해 많은 젊은 여성이 경험하는 문제 원인이 비단 개개인의 노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기업의 채용 성차별, 성별 임금격차, 유리천장, 여성화된 노동의 평가절하 등과 연결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그것은 분명 비극적인 이야기였으나 동시에 문제를 개인화하지 않고 구조를 통해 바라볼 수 있게 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청년 남성들이 봉착한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기존 가부장적 남성성의 유통기한이 지났음에도 어떤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막막함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우리 사회는 여자아이를 남자아이처럼 키우려고는 하지만 남자아이를 여자아이처럼 키우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적’, ‘남성적’으로 이야기되는 것들에 여전히 강력한 위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이 문장에서 우리가 여전히 미래세대 남성에게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느낀다. 기존 가부장 남성성을 추종하는 사회에서 소극적이거나 소심한 남성, 남성을 좋아하거나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남성, 머리를 기르거나 꽃 돌보기를 좋아하는 남성,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남성을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지 떠올려보면 그것이 왜 그저 남성의 위기가 아닌 기존 가부장적 남성성의 한계인지 더 자명해진다.
변화는 저절로, 거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은 일말의 희망은 많은 문제의 가해자가 남성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남성은 가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모든 남성이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형식적이고 변명 어린 말 말고, 이들이 함께 적극적인 역할을 할 때 변화는 가능하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 그런 새로운 남성성을 이야기하는 단체들이 늘어나고 있다. 네덜란드의 ‘이맨시페이터’(Emancipator·해방자), 스웨덴의 ‘맨’(MAN), 캐나다의 ‘화이트 리본’(White Ribbon), 미국의 ‘어 콜 투 멘’(A call to men·남성에게 고함), 브라질의 ‘프로문도’(promundo·‘촉진하다’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promover’와 세계를 뜻하는 ‘mundo’의 합성어), ‘이퀴문도’(Equimundo·‘equi’는 라틴어로 ‘평등한’을 뜻한다) 등이 그렇다. 남성의 변화와 참여를 촉구하는 단체들의 네트워크 조직인 ‘멘인게이지’(menengage·남성의 참여)에만 전 세계 84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당장 변화는 시작됐다. 과거의 향수에 머물며 폭주하는 이들을 피해 도망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새로운 남성성과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열차에 이제는 올라타야 한다.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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