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이름, 삶에 비타민 되다

입력
2023.08.16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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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자주 보게 된 것은 엉뚱하게도 코로나19 때문이었다. 공연예술계에 불어닥친 불황을 목격한 아내와 나는 '이럴 때 우리라도 극장에 가자'는 이상한 사명감으로 연극 공연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배우들의 이름도 익히게 되었다. 연극을 본 뒤 리뷰를 쓰거나 다음번에 볼 연극을 고르다 보면 당연히 배우나 연출자의 이름을 찾아보게 되는데 안타까운 건 이름이 평범해서 동명이인 연예인에게 가려지거나 검색만으로는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김은정이나 김정은, 이은정, 이정은 같은 경우는 성도 이름도 너무 친숙해서 쉽게 기억되지 않는다. 지을 때는 당연히 예쁘고 사랑스러운 이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흔한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때 '선영아 사랑해'라는 광고 캠페인이 히트한 적이 있는데 선영이라는 이름도 그때 가장 흔한 이름 중 하나라서 쓴 것이었다. 2000년대엔 난데없이 준서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이들이 많아졌는데 그건 엄마 아빠들이 드라마 '가을동화'와 신경숙 소설가의 팬이었기 때문이란 설이 파다했다.

그런데 흔한 이름의 고충을 멋지게 해결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김민정 시인이다. 시인이면서 출판사 대표이기도 한 그는 페이스북에서 자신의 이름을 김민쟁으로 바꿈으로써 수많은 김민정과의 차별화에 성공했다. 단지 끝자 '정'을 '쟁'으로 살짝 바꿈으로써 자신의 개성을 나타냄은 물론 '쟁이'로서의 정체성까지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두 번째 이름은 자신의 태도나 지향점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대중문화평론가 김작가나 CM을 찍는 백종열 감독이 장편영화를 연출할 때 사용했던 백감독 같은 경우는 이름 안에 직업을 적극적으로 집어넣은 경우다. 추리소설을 발명한 에드거 앨런 포를 너무 존경한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에도가와 란포'라고 지은 일본 작가도 있다.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일본에는 이 작가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있을 정도로 성공한 소설가가 되었다.

나의 온라인 아이디 'mangmangdy'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이 종종 있다. 나우누리라는 PC통신 사이트에 가입하며 ID를 정할 때 뭐 좀 허무한 이름이 없을까 하다 '망망대해'라는 한글 이름을 지었는데 시간이 흘러 영어 이름으로 바꿔야 한다고 하길래 앞쪽만 살리고 알파벳 'y'를 붙여 마감한 것이었다. 당시 내 이름을 들은 친구 중 하나는 이름에 망할 망 자가 두 개나 들어가 불길하니 다른 걸로 바꾸는 게 낫겠다는 충고를 했다. 죽을 사(死)가 떠오른다고 빌딩 층수 셀 때도 4층을 건너뛰는 나라다운 발상이었다. 나는 "그래? 그럼 이런 이름으로도 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줄게"라고 말하며 망망디라는 이름을 고집했다.

태어나면서 부모님이 정해주신 성과 이름을 바꾸는 건 쉽지 않다. 나와 같이 일하던 카피라이터 후배는 자신의 이름 '박수X'에서 마지막 글자를 떼버리고 개명 신청을 해 '박수'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 이름으로 바꾸고 싶어서 손목에 박수를 뜻하는 숫자 '337' 문신까지 했던 친구다. 하지만 이름을 바꾸려고 누구나 문신을 할 필요는 없다. 두 번째 이름을 정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댓글 시인으로 유명한 제페토 작가의 경우엔 피노키오를 만든 제페토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당신도 당신의 개성이나 지향점을 나타낼 수 있는 제2의 이름을 하나 지어보시라. 뭔가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 같지 않은가.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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