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에서

입력
2023.08.13 22:00
27면
경남 통영. 최흥수 기자

경남 통영. 최흥수 기자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다 빛은 맑고 푸르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1962년 발표한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서문은 통영 소개로 시작한다. 통영은 작가의 고향이다. 이 아름다운 항구도시에서는 박경리 외에도 유치환, 김춘수, 유치진, 윤이상, 전혁림, 이중섭 등의 예술가들이 태어났거나 작품 활동을 했다. 한마디로 예술의 혼이 이 도시의 골목마다 깃들어 있다. 시인 네루다가 말하길, 시인이 되려면 바닷가를 거닐며 파도의 소리를 들으면 된다고 했다. 서피랑과 동피랑 언덕에서 항구를 내려다보면 예술을 할 수밖에 없는 정경이 그려진다.

여름 휴가를 통영으로 왔다. 재충전을 해서 다시 업무에 복귀하겠다는 피고용인으로서의 순수한 생각보다는 아무런 계획 없는 완전한 방전이 목표였다. 순도 100%의 방전에 이르는 길에는 외부와의 연락 차단이 급선무다. 휴가 전 준비부터가 중요한데, 연락이 올 만한 일을 급하게 마무리해야 한다. 사나흘 전부터는 가급적 큰 수술을 하지 않는다. 휴가 전날에 눈물의 팀 회진을 돌고, 대신 회진을 돌 후배 의사를 잘 소개시켜준다. 병원을 나오는 길에는 '한 일주일 연락 안 될 거예요'라는 의미로 이메일 자동응답을 설정했다. 이 문장은 영어로 써야 그 거리감과 숭고함이 확실하게 전달된다. 세속의 먼지를 탐하는 주식 애플리케이션을 지우고, 손쉽게 일이 오고 가는 매체인 메신저의 알림 설정을 모두 껐다. 전화기도 비행모드로 설정해 내가 준비된 시간에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다.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뿔싸! 깜박하고 이 칼럼 마감을 미리 바꾸지 못했다.

경남 통영 달아공원에서 본 일몰. 최흥수 기자

경남 통영 달아공원에서 본 일몰. 최흥수 기자

봉수골에는 전혁림 미술관과 봄날의 책방이라는 동화에 등장할 만하게 아름다운 독립서점이 있다. 지방에 오면 동네책방에 들러서 책을 여러 권 산다. 책을 꼭 읽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책방을 응원하고 싶어서다. 책을 파는 사람이 살아야 글을 쓰는 사람도 산다. 한산도행 배를 타고 나가 본 통영 앞바다는 연안과 하늘을 배경으로 조그만 섬들과 점점이 박힌 양식장의 조그맣고 알록달록한 부표들이 어우러져 평화로웠다. 통영의 가장 아늑한 공간인 강구안은 한산대첩축제 기간으로 떠들썩했다. 수백 년 전 이맘때 이 평화로운 바다에서 나무로 배를 만들어 무거운 갑옷을 입고, 노를 젓고 불화살을 당기며 대포 쏘는 전쟁을 했다는 것이 상상하기 어려웠다. 남해의 섬들과 육지 사이로 좁고 빠른 수로가 있다. 경상도에는 견내량, 전라도에는 명량. 육지와 섬들 사이의 바다에서 임진왜란의 향방을 가른 전투가 있었고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승리했다. 통영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들도 일본 수군을 궤멸시켰던 학익진의 작은 날개를 했을 거라는 상상을 해봤다. 남해의 섬들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가 대한민국 영토라는 헌법적 지위를 가질 가치가 충분하다.

노을 지는 장엄한 광경을 보기 위해서는 남쪽 달아공원에 가야 한다. 남해안의 해넘이 풍경이 광대한 대서양을 보는 포르투갈의 호카곶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해안선의 곡선과 섬들의 짙은 나무들 때문이다. 앞에서부터 진한 초록, 옅은 초록, 검은색, 희뿌연 색, 회색, 그리고 하얀색 용구름으로 이어진다. 이 풍경을 보면서 강아솔의 '충무에서'라는 음반을 들으니, 어느 슬픈 날에 지는 노을을 계속 보기 위해 의자를 마흔네 번을 당겨 앉았다는 어린 왕자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흥권 분당서울대병원 대장암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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