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나라에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약 4천 종의 식물이 자랍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 풀, 꽃, 나무 이름들에 얽힌 사연과 기록, 연구사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엮을 계획입니다.
서울 강남에 서초동이 있고, 반포동과 방배동을 끼고 가로지르는 위치에 서리풀공원이 있다. 서초(瑞草)는 서리풀을 한자로 쓴 말로 상서로운 풀이라는 뜻이다. 옛날 그 지역엔 논이 많았고, 그곳에서 많이 심었던 벼를 상서로운 풀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렇게 부른 연유가 무엇이었을까?
창덕궁 후원에는 청의정(淸漪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절병통도 없이 볏짚으로만 지붕을 이은 소박한 정자인데, 그 옆엔 작은 논이 있다. 조선 인조 때인 1636년 왕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체험하는 친경(親耕)을 위해 만든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 친경에 대한 기록은 제법 있지만 유적으로 남은 유일한 벼농사 장소이다. 인조는 자신을 옹립한 세력이 폐위시킨 광해군이 시행했던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한 임금이다. 소유한 토지에 비례한 과세로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던 조세제도인 대동법의 중심 품목은 쌀이었다. 쌀을 생산하는 백성들의 수고를 공감하고자 하는 왕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설치한 오브제라 할 수 있다. 임금이 직접 심고 가꾸던 벼를 그래서 상서롭다고 하지 않았을까?
요즘 벼꽃이 한창 필 때다. 벼꽃은 자세히 봐야 보일 정도로 작은데, 사실 벼꽃으로 알고 있는 이삭에 붙은 하얀 알갱이는 벼 껍질인 왕겨 밖으로 나온 수술이다. 그 모양이 쌀을 닮았다고도 하고, 우담바라를 연상하는 이들도 있다. 수술이 이삭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벼꽃은 대부분 수정이 끝난 상태다. 비가 많은 환경에 적응한 벼꽃의 수정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암술이 벼 이삭 속에 있으니 이때의 이삭을 벼꽃이라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입국한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의 부인 크레인(Florence H. Crane) 여사는 당시 조선에서 피는 꽃들을 세밀화로 그리고, 그 꽃들과 관련한 민담 등을 엮어서 'Flowers and Folklore from Far Korea(1931)'라는 책을 출간했다. 100년 전 우리 꽃들을 채색한 세밀화로 그려서 출판한 최초이자 유일한 이 책에 검은색과 붉은색 벼 등 4종류의 벼 이삭 그림이 있다. 미술과 식물학을 전공했다는 그녀 역시 벼 이삭을 꽃으로 간주했던 것 같다. 그 그림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짚신과 새끼줄, 달걀 꾸러미에서 초가지붕에 이르기까지 당시 조선인들의 생활과 문화에 깊숙하게 자리 잡은 벼와 쌀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그녀가 받은 벼에 대한 깊은 인상이 잘 드러나 있다.
벼의 재배 기원지와 전래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야생 벼의 분포, 유전자 분석, 유적지 발굴 등을 근거로 제시한 내용이지만 기록이 없었던 오래전의 일이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전 세계 쌀의 약 90%를 아시아권에서 생산하고 있고, 우리나라 충북 옥산 소로리 선사유적에서도 1만2,500년 된 볍씨가 발견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벼 재배 기원지를 아시아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벼는 인류 특히, 대다수 아시아인에게는 삶과 문화의 근간인 작물이다. 유엔이 2004년을 '세계 쌀의 해'로 선포하며 내세운 주제는 'Rice is Life(쌀은 생명이다)'였다. 전 세계 25억 명 이상의 주식인 만큼 그 위상에 걸맞은 표현이라 생각한다. 쌀이라고 부르는 이름의 어원이 '보살'이라거나 '살다'에서 왔다거나 하는 다양한 주장들의 근저는 결국 닿아 있는 것이다.
과거와는 다른 위상이지만 쌀은 여전히 우리나라의 주식이고 우리는 매일 밥을 먹고 산다. 벼는 웬만한 태풍을 겪은 해에도,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엘리뇨의 여파 속에서도 풍년을 이뤘다. 올해처럼 기록적인 강우와 폭염 속에서도 벼꽃은 때맞춰 피고 있다. 고금을 통해 상서로움이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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