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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파괴' 실종 시대

입력
2023.08.10 00:00
27면
혁신을 거듭하던 주요 기업들이 최근 들어 당장의 이익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혁신을 거듭하던 주요 기업들이 최근 들어 당장의 이익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유명 정치학자이자 문명비평가였던 미국 하버드대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1927~2008) 교수. 그의 인생 말년 최대 관심사는 한국이었다. 2000년 로렌스 해리슨과 공저한 '문화가 중요하다'(Culture matters)에서 1960년대 이후 한국과 한국 기업이 거둔 역동적 발전에 주목했다. 또 한국이 거둔 발전의 원인을 특유의 문화에서 찾고, 이를 일반론으로 확장시키려 노력했다.

헌팅턴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과 아프리카 가나를 비교했다. 헌팅턴에 따르면, 1961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로, 가나(197달러)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당시 한국은 논밭에 의존하는 농업 의존 경제였고, 거의 모든 산업지표에서 가나에 뒤졌다. 유엔도 한국에 대해 ‘자원도 없고 교육받은 인재도 없어 도와줘 봤자 회생 가능성이 낮은 나라 1위’로 평가했다. 반면 가나에 대해서는 자원이 풍부하고 교육받은 인재가 많기 때문에 희망적인 나라로 꼽았다. 헌팅턴은 1990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이 가나의 15배로 성장한 것을 강조한 뒤 “가나에는 없었지만 한국에 있었던 것은 국민들의 행동과 정신을 180도 바꿀 수 있었던 특유의 문화였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삼성과 현대차, LG 등 주요 한국기업의 성과는 문명사적 변혁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그 어느 국가에서도 볼 수 없는 혁신을 짧은 시간에 단번에 이뤄냈기 때문이다. 이를 경영학자들은 학술 용어로 정리해 ‘동적 전환 능력’으로 부르는데, 한국 기업들은 위기 때마다 단절적 혁신의 피보팅을 만들었다. 일본의 소니와 마쓰시타가 아날로그 기술의 카이젠(점진적 개선을 통한 원가절감과 품질개선)에 머무를 때 삼성은 디지털로 대전환했고, 일본 도요타가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차를 통한 카이젠에 집중할 때 현대차는 전기차와 과감한 디자인 혁신으로 미래차로의 동적 전환을 이뤄냈다.

당연히 한국 경영학계는 우리 기업들이 보인 ‘동적 전환 능력’의 원천 찾기에 주력하고 있는데, 많은 이가 경남 진주 지역의 남명학에 주목하고 있다. 주자학이 지배하던 시기였건만 남명 조식(1501~1572)은 주자학에 머무는 대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게 학문하는 도리라고 여겼다. 양명학, 도학, 불학, 잡학 등 광범위한 학습과 세상을 위한 실천을 강조했다. 그의 정신과 사상은 16세기 이후 조선에 ‘창조적 파괴’의 맹아를 키우는 역할을 했다. 남명 사상의 본거지인 진주를 중심으로 왕조시대에는 백성을 위한 끊임없는 상소, 일제 강점기에는 의병 활동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해방 이후 삼성과 LG, 효성 등 한국의 주요 그룹 창업자들이 개인의 돈벌이 대신,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시를 내걸고 사업을 확장한 것도 남명 사상의 영향 때문으로 추정된다.

남명 사상에 대한 이런 분석이 맞는다면, 불행히도 우리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 혁신을 거듭하던 주요 기업의 행태와 상황이 갈수록 남명 사상의 본류에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혁신성은 떨어지고,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단기 성과주의가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기업가 정신을 격려해야 할 정치적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국민 정서에서도 공짜 점심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누구를 탓할 필요 없이 국민 개개인 신발 끈을 다시 묶어야 할 때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과 교수·프레지던트대학 국제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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