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던 지난달 말, 서울 송파구 올림픽체조경기장 앞에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두 시간씩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아이돌 그룹의 사인회 못지않게 장사진을 이룬 이날 행사는 중국 게임 '원신' 이용자들을 위한 여름 축제였다. 이 행사는 예전과 달라진 중국 게임의 위상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중국 호요버스가 2020년 내놓은 온라인 역할분담형 게임(RPG) 원신은 불과 2, 3년 만에 전 세계를 석권했다. 게임 데이터 조사업체 센서타워에 따르면, 올 상반기까지 원신의 전 세계 누적 매출은 48억 달러(약 6조2,400억 원)에 이른다.
이용자들 사이에서 뛰어난 이야기 전개와 그래픽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원신은 더 이상 국내 게임을 베끼던 과거의 중국 게임이 아니다. 한마디로 재미와 기술, 어느 하나 뒤처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동안 중국 게임업체들은 중국 정부 비호 아래 전략적으로 움직였다. 중국 시장을 중심으로 돈을 벌어 한국 게임업체들에 전략적 투자를 하며 개발자들을 데려가 우리의 성공 비결을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원신은 컴퓨터(PC)와 휴대기기뿐 아니라 국내 게임업체들이 소홀히 했던 가정용 게임기(콘솔)까지 넘나들며 게임을 즐기는 멀티 플랫폼과 크로스 플레이 전략을 펼쳤다.
여기에 무지막지한 물량 공세와 인공지능(AI) 등 기술력을 적절히 활용했다. 게임업계에 따르면 호요버스는 원신 이용자들에게 새로운 재미를 주기 위해 수백 명의 개발팀을 3교대로 24시간 가동한다. 이를 통해 끊임없는 업데이트로 새로운 콘텐츠를 제공한다. 또 스테이블 디퓨전 모델을 토대로 한 이미지 생성형 AI를 만들었다. 한 장 그리는 데 하루 이상 걸린 원화를 1시간에 몇백 장씩 뽑아내고 있다.
원신의 약진은 국내 게임산업의 위기로 귀결된다. 엔씨소프트, 넥슨, 넷마블 등 온라인 게임의 종가였던 국내 대형 게임업체들은 과거와 달리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3분기 정식 출시 예정인 신작 게임 '쓰론 앤 리버티'의 시험 서비스를 지난 5월 실시했으나 기대 이하라는 평가를 받고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루리웹 등 게임 이용자들이 즐겨 찾는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국내 게임업체들이 아류작을 계속 내놓는 등 과거 게임의 인기에 기대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이를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 주가다. 지난해 말 48만 원이었던 엔씨소프트 주가는 20만 원대로 반토막 났고, 7만 원을 찍었던 넷마블 주가도 5만 원 이하로 떨어졌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다. 9일부터 엔씨소프트와 넥슨 등을 시작으로 국내 게임업체들의 2분기 실적이 줄줄이 나온다. 이미 증권사들은 넥슨을 제외한 국내 게임업체들의 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일부 업체들의 목표 주가를 하향 조정했다.
그렇다 보니 국내 게임업계에서도 "교만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모 게임업체 대표는 "콘솔게임으로 잘나갔던 일본 게임업체들이 온라인 게임이 되겠냐고 한국 게임업체들을 무시했다가 온라인 게임 시장을 잃었는데, 지금 국내 대형 게임업체들이 중국 게임업체들을 얕봤다가 똑같이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제 국내 게임업체들도 기존 이용자의 이탈을 막을 수 있는 콘텐츠 전략과 AI 개발 등으로 차별화를 꾀해야 한다. 특히 대만의 위탁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반도체 업체 TSMC가 소규모 반도체 설계업체들에 투자하는 것처럼 국내 대형 게임업체들도 소규모 게임사들에 투자해 내부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는 선순환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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