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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영역 노터치가 '불문율'… 친해져도 거침없는 언행엔 거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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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 “일본인과 친구 되기가 어렵다?”
일본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어렵다는 한국인을 종종 본다. 일본인 친구를 사귀고 싶은데, 마음처럼 안 된다는 한국인 유학생의 고민을 들었다. 일본에서 직장을 다니는 한국 사람 중에 오래 알고 지낸 일본인 동료와 친구 사이로 관계가 진전되지 않아 아쉽다는 경우도 보았다. 한국에서 좋은 친구란 무엇일까? 서로에 대한 굳은 신뢰를 바탕으로 허심탄회하게 교류하는 친밀한 관계를 뜻한다. 때로는 상대방의 결점까지 너그러이 감싸주는 관대함과 이해심이야말로 끈끈한 우정의 상징이다. 어려울 때에 도움을 부탁해도 좋고, 술에 취해서 엉엉 우는 못난 모습을 보여도 좋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일본 사람이 추구하는 친구 관계는 한국 사람에게는 성에 차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좋은 친구를 정의하는 방식은 한국과 동일하다. 그런데 ‘진짜’ 우정이란 무엇인가라는 해석에서는 관점이 꽤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설혹 내가 곤란함에 처했을지라도 친구에게는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야말로 친구에 대한 진심 어린 우정을 뜻한다. 결점이나 흐트러진 모습까지 모두 공개하고 보듬는 친구 관계는, 일본인에게는 파격적이고 부담스러울 뿐 아니라 때로는 거칠고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일본인 지인으로부터 한국인과의 교류에서 당황함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인 친구가 생겨서 기쁘기는 한데, 그의 지나치게 거침없는 언행에서 종종 거부감을 느낀다는 푸념이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외모나 체형 등 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삼가는 것이 상식이다. 한국인 친구가 악의 없이 던지는 “요즘 살찐 것 아냐? 다이어트 좀 해라”는 말이 일본인에게는 상대를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무례한 언행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 한일 간 ‘친구 사귀기’ 프로토콜의 차이
외국인과 친구가 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는데, 문화적 배경에 따라 서로에게 신뢰를 쌓는 방식도, 신뢰가 쌓이는 속도감도 다르다. 상호 신뢰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실제로 만나고 대화하고 교류하는 방식이 이질적이라면 오해가 생기기도 쉽다. 같은 문화에서라면 서로에 대한 호감과 진실한 태도, 사교성으로 우정을 키워갈 수 있겠지만, 문화적인 오리엔테이션이 다른 사람들끼리 관계를 진전시키려면 삐걱거리는 지점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사실 ‘친구 사귀기’는 그 자체로 촘촘한 문화적 프로토콜을 구사해야 하는 고도의 사회적 활동이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친구로서 지속적으로 교류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이질적인 사교 문화에 적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행 중에 만난 외국인과 쉽게 안면을 트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교성을 가진 사람은 많다. 하지만, 외국인의 이질적인 교류 스타일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우정을 발전시켜 나갈 만한 인내심과 소통 능력을 갖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특히 한일 간에는 서로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인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편견이 진실인 양 받아들여지고, 일본에서는 “한국인은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이라는 편견이 은연중에 작용한다. 고정관념이 친구 사귀기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운이 정말 좋았다. 일본에서 문화적 편견이 적고 개방적인 마인드의 일본인을 많이 만났고 그들과 정말 좋은 친구가 되었다. 지금도 국경을 넘은 우정은 무엇보다 소중한 삶의 자산이다.
그렇다면 한일 간 ‘친구 사귀기’의 프로토콜은 어떻게 다를까? 한국에서는 타인을 처음 만났을 때에 나이나 결혼 여부, 출신 지역 등 사적인 정보를 일단 묻고 시작한다. 속된 말로 일단 ‘민증을 까야’, 친근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기본 조건이 마련된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런 사적인 질문은 관계가 꽤 가까워진 뒤에 던지는 것이 상식이다. 달리 말하자면, 친구를 사귀는 데에 연령, 학연, 지연, 결혼 여부 등 사회적인 배경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이다. 물론 같은 학교를 졸업했다거나, 동일한 지역 출신이라거나 하는 사실이 서로 대화의 소재를 찾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 보면, 친구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도 좀 더 높은 것은 사실이겠다. 하지만, 한국처럼 연령이나 출신 지역이 같다고 해서 “우리는 친구다, 반말하자!”며 갑자기 관계를 급발진시키는 상황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일본인 친구와 사귀는 과정은 마치 축구 선수가 빌드업을 하듯 시간이 걸리지만, 끈기 있게 만남을 거듭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편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친구가 될 수 있다.
한편, 일본 사회 전반적으로 자리 잡은 개인주의가 수평적인 친구 관계의 조건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식사자리나 술자리에서 기본적으로 ‘더치페이’의 원칙이 지켜진다.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에게 밥을 사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없다. 또, 이번에는 A가 밥을 사면 다음번에는 B가 밥을 사자는 식으로 식대를 돌아가며 부담하는 방식도 일반적이지 않다. 한국인에게는 각자 자기의 밥값만을 부담하는 산뜻한 만남이 계산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거꾸로 일본인에게는 자기의 밥값을 내주겠다는 상대방의 제안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그가 베푸는 성의를 받아들이는 순간, 다음에는 내가 밥을 사야 한다는 채무 의식이 생기기 때문이다.
내가 허물없이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본인 친구 중 한 명은 10세 연상, 또 다른 친구는 띠동갑 연하이다. 연륜이 있는 연상 친구의 사려 깊은 조언으로 인생 위기를 넘긴 적도 있고, 아르바이트 급료가 입금되기 직전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던 연하의 친구에게 밥을 사준 적도 있다. 하지만, 연상 친구에게 내가 조언을 건네는 경우도 있고, 가끔은 연하의 친구로부터 술 한잔을 얻어 마시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수평적인 관계에서 친밀하게 교류하고 있다. 연령이 사회관계의 서열을 규정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내게는 실로 값진 인간관계다.
◇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국과 일본은 문화적 근린
한국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끈끈하고 열정적인 친구 관계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나만 해도 서로의 사적인 영역을 성실하게 지키는 ‘일본식’ 교제가 그리운 순간이 많다. 갑작스럽게 사적인 영역으로 ‘훅’ 들어오는 한국 사회의 인간관계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고, 나이나 성별 등의 요소가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성가시게 느껴질 때도 있다. 반면, 일본 사회의 인간관계가 피상적이고 인간미가 없다고 불평하는 일본인 친구도 있었다. 해외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와의 ‘뜨끈뜨끈’한 인간관계에서 큰 만족감을 느낀다던 그는 몇 년 전 한국으로 이주해 생활 중이다. 한국과 일본의 ‘친구 사귀기’ 프로토콜이 다르다고는 해도, 상대적으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비교적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동질적인 측면도 클 것이다.
사실 한국도 일본도 아닌 외국에서 만났을 때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 친구가 될 확률이 높은 편이다. 영어권 나라에 유학했다가 일본인과 ‘베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한국인에게는 일본인이, 일본인에게는 한국인이, 모국인 다음으로 우정을 키우기 쉬운 상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국문화와 일본문화는 지근거리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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