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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사람 마음에 담긴 사람다움에서 일어난다

입력
2023.08.03 19:00
25면

편집자주

'삼국유사'는 함께 읽어 즐겁고 유익한 우리 민족의 고전이다. 온갖 이야기 속에는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이 원형처럼 담겼다. 이야기 하나하나에 돋보기를 대고 다가가 1,500여 년 전 조상들의 삶과 우리들의 세계를 함께 살펴본다.

삽화=신동준기자

삽화=신동준기자

13세기 내우외환 속 일연 스님
삼국유사에 남긴 두 가지 기적
안전망보다 중요한 마음가짐

13세기 고려의 100년은 내란과 외환의 연속이었다. 무신정권(1170~1270)이 들어서는 내란 와중에 몽골과의 전쟁(1231~1257)이 뒤를 이었다. 몽골이 강요한 일본 원정(1274·1281)에도 울며 겨자 먹기로 나서야 했다. 국력 소모는 말할 것 없고, 백성의 피폐한 삶은 정상으로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시절의 고난은 식민, 전쟁, 군사독재로 점철한 20세기 우리와 무척 닮았다. 그래서 요즘 자꾸 13세기를 떠올린다.

일연 스님(1206~1289)은 바로 그 시절을 살다 간 사람이다. 그렇다고 그때를 상세히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았다. 그가 편찬한 '삼국유사'에 삼국의 옛일을 적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시대를 은연중에 반영한다. 내란과 외환이 유독 심해서였을까, 재난 속에 당한 고통과 그것을 이겨내려는 '삼국유사' 속의 이야기가 옛일 같지만 않다. 그 가운데 두 가지를 소개한다.

최승로(927~989)는 고려 초기 대표적 문신(文臣)이다. 그가 어려서 겪은 기적적인 경험은 경주의 중생사(衆生寺)라는 절의 관음보살상과 엮여 있다. 이곳엔 중국에서 온 화가가 만들어 많은 영험을 준다는 보살상이 있었는데, 늦게까지 아이를 얻지 못한 최은함이 여기 와서 간절한 기도 끝에 얻은 아들이 최승로이다. 그런데 승로가 채 백일도 되기 전, 견훤이 경주에 쳐들어와 피바람을 불러일으키자 은함은 다시 이 절로 찾아와 아이를 보살상 앞에 홀로 내려놓고 피란을 간다. '주신 것도 당신, 지켜주실 것도 당신'이라 믿어서다. 보름이나 지나 견훤이 물러간 다음 찾아오니 과연 믿은 대로 기적이 일어났다. 어린아이가 어디 하나 다친 데 없이 "피부가 마치 새로 목욕한 듯 몸이 반들반들하며, 입언저리에서는 아직 젖 냄새가 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보살상이 지켜준 덕분이라 여겼다.

또 다른 이야기가 경주에 사는 손순이라는 사람과 돌종에 얽힌 사연이다. 효행을 강조하는 이야기인데, 정작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기는 하다.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손순에게 골칫덩이 아들이 있다. 손자인 이 녀석이 자꾸만 할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는 것이었다. '자식은 또 얻으나 어머니는 다시없다'고 생각한 손순은 아들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 대목이 찜찜하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묻어버릴 땅을 파는데 그 속에서 돌종이 나온다. 손순의 부인은 "기이한 물건을 발견했으니 아마도 아이의 복인가 합니다. 묻어선 안 되겠어요"라고 설득했다. 돌종을 치자 이제껏 듣지 못한 기이한 소리가 나고, 은은히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아이를 살리는 소리였다.

실상 두 이야기는 기아(棄兒)가 배경에 깔려있다. 전쟁과 기근이라는 재난 속에 아이가 버려지는 비극이다. 죽음이 강요되는 상황이다. 이 상황이 어떻게 바뀌는지, 일연이 보여주고 싶은 장면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죽음을 넘어 기어이 찾아가는 ‘살림’이어야 한다.

왜였을까. 왜 일연은 이런 이야기에 진심이었을까? 실제로 자신이 살았던 시대가 그랬었기 때문이다. 몽골군에 쫓기는 아비가 자식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도망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피란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극한 비정의 이런 세상, 옛이야기가 무슨 힘이 있을까만 진정한 기적은 무기가 아니라 사람 마음에 담은 사람다움에서 일어난다고 가만히 일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마음이 보살이고 돌종의 은은한 소리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우리는 제도로서의 사회적 안전망 같은 것을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보살과 돌종에 비교하여 본질적으로 하나도 다르지 않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살리는 마음이다. 그런데 제도와 마음 모두 심각하게 훼손된 것이 분명하다. 멀쩡한 거리에서 사람이 어처구니없이 죽은 겨울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물이 들어차는 죽음의 지하도를 막지 못했다. 사고도 놀랍지만 뒷일을 처리하는 모양새는 더욱 기가 차다. 제도는 있어도 껍데기뿐이고, 마음은 남 탓하며 제 몫 지키기에 급급하다.

뜨거운 여름을 힘들게 건너고 있다. 식구를 잃은 망연한 이들이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넘기는 사이 허황한 큰소리만 자자하다. 이래서야 보살도 종소리도 숨어 버린다.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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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기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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