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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오빠, 자기야" 했다간 최대 사형... 괴뢰말투 처벌에 남북 소통 단절[문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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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괴뢰말투로 말하거나 글을 쓰거나 괴뢰말투로 된 통보문, 전자우편을 주고받거나 괴뢰말 또는 괴뢰서체로 표기된 인쇄물, 녹화물, 편집물, 그림, 사진, 족자 같은 것을 만든 자는 6년 이상의 노동교화형에 처한다. 정상이 무거운 경우에는 무기노동교화형 또는 사형에 처한다."
북한 평양문화어보호법 제5장 58조 괴뢰말투사용죄
올 1월 북한은 자신들의 표준어인 '문화어' 보호를 위해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제정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6월에 공개됐습니다. 위와 같이 내용은 꽤나 섬뜩합니다. '괴뢰말투'(한국 말투)를 사용하거나 가르치면(동법 제59조 괴뢰말투유포죄) 최대 사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법 조문을 더 살펴볼까요. 법은 괴뢰말투를 본따거나 유포한 자에 대해 "괴뢰문화에 오염된 쓰레기로, 범죄자로 낙인하고 그가 누구든 경중을 따지지 않고 극형에 이르기까지 엄한 법적 제재를 가하도록 한다"고 처벌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 "공개재판, 공개처형 등 공개투쟁을 통해 썩어빠진 괴뢰문화에 오염된 자들의 기를 꺾어놓고 광범한 군중을 각성시켜야 한다"며 '일벌백계'를 예고하기도 했습니다.
공개 망신을 주는 방식도 포함됐습니다. 자녀교육을 제대로 못한 부모에게도 책임을 물어 "여러 모임에서 자료를 통보해 망신을 줘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 괴뢰말투를 따라 하는 현상을 신랄히 폭로하고, 괴뢰말투를 쓰는 대상이 전 사회적으로 속박당하고 멸시당하고 손가락질당하면서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도 적혀 있습니다.
법에는 구체적인 '괴뢰말 찌꺼기'의 사례도 담겨 있습니다. "공민은 혈육관계가 아닌 청춘남녀들 사이에 '오빠'라고 부르거나 직무 뒤에 '님'을 붙여 부르는 것과 같은 괴뢰식부름말을 본따지 말아야 한다"며 소년단 시절까지는 '오빠'라고 부를 수 있지만, 청년동맹원이 된 다음부터는 '동지', '동무'만 써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또 "비굴하고 간드러지며 역스럽게 말꼬리를 길게 끌어서 올리는 괴뢰식 억양을 본따는 행위", "자녀의 이름을 괴뢰식으로 너절하게 짓거나, 손전화기 콤퓨터망에서 괴뢰말투를 본딴 가명을 쓰는 행위"도 금지했습니다.
북한이 이처럼 한국 말투가 스며드는 것에 극도의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법은 "평양문화어를 보호하는 것은 우리 사상, 제도, 문화를 고수하고 빛내기 위한 중차대한 사업"이라며 "괴뢰말 찌꺼기를 박멸하는 것은 사회주의제도와 인민의 정신문화생활을 고수하고 혁명진지, 계급진지를 더욱 굳건히 다지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의 주요 점검 타깃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며 탄생한 '장마당 세대'입니다. 현재 20대 후반~30대에 해당하는 이들은 배급 체계의 붕괴로 부모가 장마당 활동 등 비공식 경제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즉 자본주의 맛을 보며 성장한 세대죠.
국가정보원은 북중 접경지대에 한국 콘텐츠가 담긴 CD를 배포해 중국에 한국 문화를 전파하기 위한 작전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장마당 세대는 이처럼 불법적으로 들어온 한국 드라마, 영화, K팝 등을 삼삼오오 모여 몰래 소비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의 배우와 가수를 선망하고, 사회주의 체제의 유지와 수호보다는 개인의 이익과 행복 추구에 더 관심이 많은 세대로 성장했습니다.
북한은 이런 상황을 유일사상체계를 흔드는 반동의 씨앗으로 보고 있습니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해 청년절(8월 28일) "1990년대 여러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붕괴된 것은 청년들이 자본주의사상 독소에 오염된 데서 초래된 필연적 결과였다"며 "젊은 세대가 향락과 안일만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로, 사회주의 애국청년의 순결성을 오염시키려는 자본주의 마수와의 대결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북한은 2020년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북한 당국의 으름장은 어느 정도 통한 모양입니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에 따르면, 최근 북한 주민들은 북한 말투로 대화하는 연습을 하는 정황도 포착됐습니다. 평안북도의 내부 소식통은 이 방송에서 "단속이 강화되자 입에 밴 한국식 언어습관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오빠, 자기야, 사랑해 등 한국 말투를 쓰지 않고, '기래서' '알간' 등 평양말을 연습하는 실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북한의 '언어·문화 쇄국정책' 탓에 남북한의 언어 이질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2016년 조사에 따르면 남한의 표준국어대사전(1999년)과 북한의 조선말대사전(2006년)을 비교했더니 일반어는 38%, 전문어는 66%가 다른 어휘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일상 대화에 쓰이는 단어 10개 중 4개는 서로 못 알아듣는다는 얘기입니다. 실제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의 72%가 언어문제로 생활에 불편을 겪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줄임말 등 MZ세대 용어가 확산된 지금은 서로의 대화를 이해하기가 더 힘들겠죠.
"바보 가시아버지를 모시고 동거살이를 하는 뜨게부부의 패린 가두녀성을 눅잦혔다."
북한 문화어로 된 이 문장을 이해하실 수 있나요? 남북한 언어 차이를 보이려고 만든 문장이라 다소 어색하긴 하지만, 우리말로 바꾸면 "치매에 걸린 장인어른을 모시고 셋방살이를 하는 신혼부부의 여윈 가정주부를 위로했다"는 뜻입니다. 같은 단어인데 뜻은 딴판이거나(바보, 동거살이), 곱씹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단어(뜨게부부)도 있지만,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단어(눅잦히다, 패리다)도 있습니다. 이 밖에도 오리가리(갈기갈기), 이신작칙(솔선수범), 가갸시절(초보시절), 꽝포(거짓말), 뜻빛깔(뉘앙스), 말밥(구설), 빗말(실언), 삐치다(참견하다), 야경벌이(도둑질), 째째하다(확실하다), 침투하다(설명하다), 탕개(긴장), 해방처녀(미혼모) 등 서로 알아듣기 힘든 어휘들이 수두룩합니다.
남북 언어 차이는 어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탈북자 출신 국어교사 등과 함께 남북 국어 교과를 비교 연구한 변정훈 드림학교(탈북자 대안학교) 국어교사는 "북한의 말하기·듣기는 한국과 큰 차이가 있다"며 "북한은 인민들 간의 소통보다는 수령의 교시를 일방향으로 전파하는 기능을 최우선으로 교육받기 때문에 대화의 상황과 화자·청자에 따른 의사소통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연구책임자인 강보선 대구대 교수는 "북한 이탈주민들이 대화 상황 속에서 필요한 지식과 태도를 북한에서 학습했다면 현재 남한에서 겪고 있는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상당히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이 속한 '중등통일국어 남북연구자모임'은 통일을 대비해 과도기 단계의 남북한 통합 국어교육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남북한의 언어는 서로 멀어져만 가는데, 북한에서도 영어교육 붐이 일고 있다는 소식에 뭔가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최근 평양의 일부 유치원은 영어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디즈니 만화영화인 '겨울왕국'을 활용해 영어수업을 하는 모습이 공개되기도 했고, 심지어 유아 영어 사교육도 이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극소수이긴 하겠지만, 한국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입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고등교육 개혁을 강조하면서 "두 발은 내 땅에, 눈은 세계로"라며 영어를 배워 국가에 기여하자는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만약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먼 훗날 북한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말보다는 영어로 대화하는 게 편한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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