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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병들게 하는 순응

입력
2023.08.01 22:00
27면
넷플릭스 드라마 'D.P.'.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D.P.'. 넷플릭스 제공

필자는 대학에서 조직행동론을 강의한다. 조직행동론에서는 조직 상황에서 인간의 지각, 감정, 태도, 행동 등에 대해서 배운다. 개인을 동기부여하는 방법과 리더십 이론도 학습한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고 강의장에서 학생들을 직접 만나게 되면서 수업은 토론 위주로 진행한다. 그러면서 남학생들의 군대 경험을 다수 듣게 되었는데, 군 복무를 통해 한국 남성들이 사회화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직사회화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긍정과 부정의 효과가 모두 있겠지만, 부대에서 불합리와 부조리를 많이 겪을수록 현실 순응형 자세를 갖게 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오래된 조사이기는 하지만, 한국 남성의 군대 경험이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는 조사도 있다. 2005년 모 신문사가 20대 남성 240명을 대상으로 군대 경험이 심리·사회적 영역에서 한국 남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군대는 현실 순응적 인재를 만든다. 현실 순응성은 위계질서를 중시하고, 정해진 질서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은 손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정도가 더할수록 점수가 높게 나오는데, 행정병 출신은 7점 만점에 4.12점, 비행정병 출신은 4.09점으로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남성의 3.55점보다 높았다. 이 조사로만 보면, 한국 남성은 군경험을 통해 부조리한 명령이나 질서에 순응하는 성향을 갖게 되는 셈이다.

물론 그 이후 병영문화도 많이 바뀌었고 세월이 지났지만, 이런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우려된다. 몇 년 전 유명 컨설팅회사 면접에서 남성 면접관이 여성 지원자에게 "남자들은 상사가 시키면 속으로 욕할지는 몰라도 그냥 하고, 여자는 '왜'와 '어떻게'를 묻는다."는 발언을 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유형인데, 주로 남성이 그렇다는 것으로 비처져 논란이 됐다.

대중매체가 그려내는 군대 모습이 여전히 과거의 부조리를 답습하고 있는 것도 우려된다. 탈영병들을 추적하는 군무이탈 체포조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D.P.'를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가혹행위와 말도 안 되는 갑질이 버젓이 행해지는 장면을 보면서, 현실이 아닌 작가 상상력의 산물이리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연예인들이 군부대를 찾아 군인들의 훈련과 일상을 체험하는 리얼 버라이어티를 보면서는 무자비한 기합과 호통 없이는 훈련이 불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군 조직에는 인간은 엄격한 감독과 명령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X이론의 신봉자들만 있단 말인가. 물론 희망적 사례도 많다. 후임병 시절 억압적 대우를 받았지만, 선임이 된 후에 불합리한 관행을 뜯어고치고 새로운 문화를 정립하려 노력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 노력이 모여 군대가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하게 될것이다.

군 복무 여부와 성별을 떠나 억압적 환경에 노출될수록 '학습된 무기력'에 빠질 가능성은 크다. 상사·동료와 협조적 관계를 구축하더라도, 구조적으로 잘못된 관행에는 분연히 일어나 분노하는 게 조직과 개인 모두를 위한 일이라 생각한다. '아니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더 많아지는 게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될거라 믿는다.


유재경 국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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