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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의 인권탄압? 악동들의 민폐?… 영국 밴드 '남남 키스' 논란 가열

입력
2023.07.29 04: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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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더 1975' 말레이 공연 후폭풍
"되레 현지 성소수자, 더 곤경 처해"

영국 밴드 '더 1975'의 멤버 매티 힐리가 지난해 8월 영국 버크셔주 레딩에서 열린 '레딩 페스티벌'에서 공연하고 있다. 레딩=AP 연합뉴스

영국 밴드 '더 1975'의 멤버 매티 힐리가 지난해 8월 영국 버크셔주 레딩에서 열린 '레딩 페스티벌'에서 공연하고 있다. 레딩=AP 연합뉴스

동성 간 사랑을 법으로 금지한 국가에서 관련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은 성소수자에 대한 연대의 표현일까, 아니면 오히려 그들을 곤란하게 만든 민폐 행위일까. 영국 밴드 ‘더 1975(The 1975)’가 말레이시아 공연 도중 무대 위에서 동성 키스 행위를 한 사실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해당 공연을 전면 취소하자, 해외에선 '부당한 처사'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성소수자가 성적 지향을 이유로 받는 비난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만큼, 동성애를 혐오하는 국가가 손가락질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반대편에선 “밴드의 배려 없는 행동이 오히려 차별과 맞서 싸우는 이들을 어려움에 빠뜨렸다”는 목소리도 크다.

"말레이가 성소수자 차별해"

28일 말레이메일 등 말레이시아 현지 매체에 따르면, 사건이 불거진 건 지난달 21일이었다. 영국 밴드 ‘더 1975’ 남성 보컬 매티 힐리가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음악 축제 공연 도중 “동성애를 혐오하는 국가에선 공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뒤, 곧바로 옆에 있던 남성 멤버와 수분 동안 입을 맞춘 것이다.

말레이시아는 발칵 뒤집혔다. 이슬람교가 국교인 말레이시아에서 동성애는 징역 20년 이상 또는 태형을 선고받는 중범죄로 취급받는다. 힐리는 공개석상에서 노골적으로 이에 반기를 든 셈이다. 당국은 ‘더 1975’의 말레이시아 공연 중단뿐 아니라, 이틀간 더 예정돼 있던 음악 축제 일정을 모두 취소해 버렸다.

‘악동’ 밴드의 해프닝으로 끝날 듯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논란은 더욱 가열되고 있다. 서방 일부에선 말레이시아가 동성애 혐오를 부추기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주장한다. 누구든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차별과 처벌을 받아선 안 되는데, 정부가 그들을 범죄자로 몰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연방 소식을 전하는 매체 ‘라운드테이블’은 “성소수자(LGBTQ+)에 대한 이해는 인권 건전성의 지표”라며 “말레이시아의 성소수자 차별과 인권유린 상황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전했다.

이달 1일 영국 런던에서 성소수자 단체 회원들이 '우리는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런던=AFP 연합뉴스

이달 1일 영국 런던에서 성소수자 단체 회원들이 '우리는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런던=AFP 연합뉴스


뒷일 고민 안 한 "구세주 콤플렉스"

그러나 밴드의 무책임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문화적 상대성과 국가의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만 표현하는 게 온당하느냐는 비판이다. 외국 가수의 돌발 행동이 오히려 말레이시아 성소수자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말레이시아 남성 동성애자는 미국 CNN방송에 “LGBTQ+ 커뮤니티에 대한 적대감이 커질 수 있다”며 “힐리는 우리를 위해 무언가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백인의 구세주 콤플렉스(Messiah Syndrome·사람을 돕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심리)’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밴드 공연을 기다리던 다른 나라 팬들도 졸지에 피해를 봤다. ‘더 1975’가 말레이시아를 쫓겨나다시피 떠나면서, 다음 일정인 인도네시아·대만 공연까지 취소한 탓이다. 대만은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을 허용하고 매년 아시아 최대 규모의 성소수자 퍼레이드가 열리는 등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국가다.

반면 말레이시아처럼 무슬림 인구가 많은 인도네시아의 경우, 가슴을 쓸어내리는 분위기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포스트는 “일부 팬들은 갑작스러운 공연 취소에 안타까워했고, 몇몇은 자국에서 발생할 뻔했던 사건을 방지해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고 전했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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