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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AI는 왜 여성의 목소리로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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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아파트로 이사 왔을 때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안내방송이었다. 나무 방제를 했으니 피부에 닿지 않게 주의하라든가 쓰레기를 아래로 던지거나 담배를 피우지 말라든가 하는 단속성 공지 사항이 일주일에 두세 번 집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질 때마다 얼마나 황당했던지. 내 집이 아니라 거리에 나앉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오며 가며 보는 관리사무실 직원의 목소리라 얼마 안 있어 익숙해졌다. 그러던 것이 5년 전쯤부터 기계음으로 바뀌었는데 묘하게 인공적인 여성의 목소리를 한 안내음에는 영 적응이 되질 않는다. 어디 이것뿐이랴. 아침마다 허겁지겁 올라타는 엘리베이터 층수 안내음, 버스와 지하철의 다양한 언어로 구성된 안내 및 주의사항, 자동차의 내비게이션 안내음과 스마트 기기 AI 음성인식장치들까지, 일상에 파고든 기계와 AI는 여성의 목소리로 우리를 안내하고, 도와준다.
한국 사회의 일상 속 안내음들이 특정 데시벨의 여성 목소리임을 명료하게 인지하게 된 건 최근 몇 년 동안 살았던 베를린에서였다. 베를린에서도 집단 주택에 살았지만 안내방송 스피커는 없었고, 엘리베이터는 워낙 희귀했다. 지하철과 버스는 혼잡한 몇 개 역을 제외하고는 독일어로 다음 역명을 알려주는 것으로 끝이다. 인상적이게도 위엄 있는 남녀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나온다. 또한 한국에서 역마다 들어야 하는 조심하라든가 감사하다든가 하는 말은 들을 수 없다. 독일의 안내방송이 ‘우린 네가 알아야 할 공지사항을 전달하고 있어. 네가 알아서 해야 해’ 정도의 느낌이라면 한국의 안내방송은 ‘저희는 고객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 생기지 않도록 제발 이러저러한 사항을 지켜주세요’ 정도로 보다 절박하게 간청하는 느낌이랄까.
이처럼 한국의 공공 공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안내음은 왜 특정한 톤의 여성 목소리를 띠게 되었을까? 기계 안내음의 기원이랄 수 있는 대중교통에 주목해 보면 기계 안내음 이전에 사람의 안내가 있었다. 1980년대만 해도 흔히 볼 수 있었던 버스 안내양이 그들이다.
‘오라이(All right, 승객이 다 탔으니 출발한다는 의미)’와 ‘스톱(Stop, 멈춰야 하는 곳이라는 의미)’을 외치는 모습으로 기억되는 버스 안내양이 하나의 직업으로 출현한 때는 일제강점기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중교통의 효시인 전차에서 승객을 태우고 운임을 받고 안내도 하는 차장이 남성이었던 데 반해 이후 등장한 버스는 여성 차장을 도입했다. 보다 새로운 탈 것이었던 버스를 타려면 전차보다 비싼 운임을 지불해야 했다. 버스 회사들은 여성 차장이 새롭고 모던한 탈것으로서의 버스 이미지를 강화해 영업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여성들은 산술과 일본어 구술시험을 치러야 했고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를 가졌는지도 심사받았으며 ‘꾀꼬리 같은 목청’을 지녔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에서 쓸 만한 차는 거의 없었다. 남은 버스는 목탄과 카바이드를 연료로 움직이는 차였기에 연료를 넣는 이가 필요했다. ‘조수’로 불린 10대 후반의 남성들이 그 일을 했고 이후 휘발유버스가 등장하면서 버스 차장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61년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부는 그해 6월 20일 교통부 지시를 통해 모든 버스 차장을 전원 여성으로 교체하도록 했고 ‘차장’ 대신 ‘안내원’으로 부르기로 했다. 교통부는 여객안내를 여성에게 적합한 서비스업으로 규정하고, 이참에 여성노동력을 개발하고 서울의 품위도 높일 수 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남성 차장의 잦은 폭행 사건과 요금 시비가 사회 문제로 불거지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버스 안내양’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남성 차장들이 문제를 일으킨 원인, 즉 저임금 장시간 고강도 노동이라는 조건의 해결 대신 여성들을 투입해서 문제를 덮으려고 한 시도는 성공하기 어려웠다. 곧 버스 안내양의 불친절이 온 언론이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문제가 되었다. 정부는 ‘모범 여차장’을 선발하고, ‘친절 봉사’ 표어를 차내에 붙였으며 버스 안내양 양성 학원에 친절 소양교육을 위탁 실시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런데 당시 소양교육의 내용을 보면 태도는 그렇다 치고 음성에 대한 자세한 지시 사항이 이채롭다. “손님과 얘기할 때는 어조에 조심하고 예의 있는 언사를 사용하여야 하며 음성은 명랑하고 너무 높거나 낮아서는 안 된다...”('동아일보' 1963년 5월 7일 자)는 것이다. ‘조심하고 예의 있으며 명랑하지만 너무 높거나 낮지는 않은’ 목소리라니! 구체적이지만 조화하기 쉽지 않은 이 자질들은 곧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여성성과도 연결되는 것이었다.
버스 안내양에게 친절한 태도와 목소리를 갖출 것을 요구하는 사회가 그들의 노동 조건 개선에 관심을 기울일 리는 만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개문발차 시 사고나 ‘요금 삥땅’ 몸수색을 빙자한 성희롱, 성폭력 사건들이 벌어지고 이슈화되면서 버스 안내양은 점점 더 나쁜 일자리가 되어갔다. 마침 가속화되던 산업화로 공장 여성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던 참이었다. 게다가 1980년 서울 지하철 3, 4호선 착공으로 도래한 본격적인 지하철 시대로 버스업계의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1987년 등장한 ‘시민자율버스’ 즉 안내양 없는 버스는 이런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의 버스 안내양은 사라졌지만 그들에게 그토록 기대하고 강제했던 ‘친절’은 여성 목소리의 안내음으로 재탄생했다. 시민자율버스는 녹음된 안내음을 방송했는데 초기에 이는 안내양 역할을 ‘대신’해 주는 ‘컴퓨터 안내양’이라고 불렸다. 당시 언론은 이 안내음을 “앳된 소녀의 명랑한 목소리”('동아일보' 1981년 4월 18일 자), “상냥한 안내양의 목소리”('동아일보' 1981년 9월 23일 자)로 표현했다. 곧 엘리베이터와 114 안내 또한 살아있는 여성의 노동에서 여성의 기계음으로 대체되었다.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 여성에게 ‘꾀꼬리 같은 목청’을 갖추라느니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명랑한 목소리’로 예의를 지키라느니 규제하고 훈육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음성을 포함한 용모와 태도 등 여성성에의 규제는 항공사, 백화점, 마트, 콜센터 등 여성들이 주로 일하는 일터에서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계음과 AI 음성인식장치의 음성 디폴트값이 여성의 목소리인 것은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애플의 음성인식장치 시리(Siri)는 ‘승리를 이끄는 아름다운 여성’을 뜻하며, 처음에는 여성의 목소리로만 출시되었다가 이후 남성 목소리가 추가되었다. 올해 7월 7일에 열린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주최 AI 로봇 최초의 기자회견에 등장한 9개의 로봇 중 대부분이 여성의 목소리로 응답했다. 최근 ‘전문성’과 ‘신뢰감’을 주는 것이 중요한 기술 제품의 AS라든가 주식 거래 관련 앱에서 남성 목소리를 설정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지만 ‘친절한 안내’=여성 목소리, ‘신뢰감을 주는 전문성’=남성 목소리라는 기왕의 젠더 위계를 새롭게 강화할 뿐이다.
그렇다면 던져야 할 질문은 기계와 AI에 집요하게 인간의 목소리를 장착하려는 이유이지 않을까. 왜 우리는 기계와 AI가 특정 성별의 인간 목소리를 갖기 바라는가. 기계 장치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낯선 존재들을 인간화하는 방식이다. 타자로서의 기계와 AI를 인간을 둘러싼 환경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영국의 소설가 메리 셸리는 1818년 소설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에서 괴물-로봇을 만든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자신의 창조물과의 관계와 갈등으로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낸 바 있다. 이처럼 너무도 인간적인 기계 장치의 목소리들은 바로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들인지를 명료하게 비춰 보여준다는 점에서 섬뜩하다. 더욱 큰 문제는 인간의 편견을 반영한 기계 장치의 목소리가 그 편견을 새롭게 강화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이다. 결국 기계와 AI의 젠더 위계적 목소리를 변화시키는 일은 우리 안의 젠더 위계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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