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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병철 회장은 1963년, 왜 한국일보에 기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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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주장만 펼치는 시대 ‘내부를 들여다보는 관찰력’(인사이트)이 아닌 ‘기존 틀을 깨는 새로운 관점’(아웃사이트)이 필요합니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이 격주로 여러 현안에 대해 보수와 진보의 고정관념을 넘은 새로운 관점의 글쓰기에 나섭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룹 방탄소년단(BTS)으로 상징되는 케이팝(K-POP)이 포함될 것이다. K콘텐츠로 상징되는 한류도 포함된다. 그런데 외국에서 한국에 대해 더 부러워하는 것은 ‘기적의 경제성장’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00달러가 되지 않았다. 최근 한국의 1인당 GDP는 약 3만5,000달러다. 한국은 70년 만에 소득이 350배 이상 증가한 나라다. 세계경제사를 통틀어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한국은 어떻게 ‘기적의 경제성장’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분석은 매우 다채롭다. ①수출주도 경제성장 ②정부주도 산업화 ③민간분야 기업인들의 기업가 정신 ④높은 수준의 교육투자 ⑤토지개혁을 비롯한 사회통합적 제도개혁 등이 모두 해당한다. 이 중에서 우리가 특히 많이 들어본 것은 ‘정부주도 산업화’다.
정부 주도 산업화는 절반만 맞는 말이다. 실제 한국 경제사를 살펴보면 ‘기업인들이 주도한’ 경우가 많았음을 알게 된다. 혹은 정부가 ‘기업인들의 제안을 수용한’ 경우가 많았다.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기업인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경제기적을 상징하는 기업인은 삼성의 이병철과 이건희, 현대의 정주영, 포항제철의 박태준 등이다. 이 중에서 1963년 삼성의 창업주였던 이병철 회장의 한국일보 기고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이 회장은 '우리가 잘 사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일보에 연재를 한다. 1963년 5월 30일에 첫 회가 실린다. 6월 5일까지 총 6회분이 실린다. 이 글은 한국경제사에서 차지했던 중요도에 비해 그간 덜 알려졌던 부분이다. 한국경제사 연구자들도, 심지어 삼성 관계자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6회분으로 연재된 '우리가 잘 사는 길'의 구성은 다섯 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괄호는 기고 일이다. ①우리의 빈곤(5월 30일) ②우리의 반성(5월 31일) ③부정축재 처리문제(6월 1일) ④경제 5개년 계획의 성취를 위하여(6월 2, 4일) ⑤좋은 장래를 위하여(6월 5일)이다.
'우리가 잘 사는 길'의 내용은 빈곤의 원인 규명에서부터 시작한다. 당시 최대 문제는 빈곤 타파였기 때문이다. 한국이 겪고 있는 빈곤의 근본 원인을 인적자원 결여와 자원의 결핍으로 본다. 빈곤과 청렴을 혼동하는 당대의 문화적 풍조를 비판하고 빈곤을 타파하려면 ‘잘 살아보겠다’는 강한 의욕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5·16 직후 군사정부가 추진했던 부정축재자 처리가 잘못된 정책이었다는 것도 지적한다. 열심히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세금을 납부한 기업인은 처벌받고, 오히려 고리대금이나 부동산 투자를 한 사람들은 처벌받지 않는 풍조를 조장한다고 비판한다. 경제성장의 관점에서도 부정축재자 처벌 기간에 성장률이 절반 가까이 떨어지고, 경제가 후퇴했음을 수치로 보여준다.
이 글의 백미는 '경제 5개년 계획의 성취를 위하여' 부분이다. '경제발전 전략'을 둘러싼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반, 경제발전 전략을 둘러싼 논란은 크게 네 가지 논점에서 있었다. 첫째, 농업과 공업 중에서 무엇을 더 중시할지였다. '농업 우선'을 중농정책, '공업 우선'을 중공정책이라 표현했다. 둘째, 공업화 전략에서 '수출 중심'과 '수입 대체' 중에 무엇을 중시할지였다. 셋째, 국내 자본 동원과 외자 유치의 자본 조달 방법론이었다. 넷째, 대기업과 중소기업 중에 무엇을 우선할지였다.
이 회장은 기고문을 통해 분명한 입장을 밝힌다. ①공업 우선 ②수출 중심 ③외자 유치 ④대기업 중심 성장 전략이다. 다음은 당시 기고문 내용의 일부다.
“경제발전사의 고전적인 코스를 따른다면, 먼저 농업을 발달시켜 자본과 시장을 키운다. 그리고 수공업, 경공업을 일으키며,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점차로 중공업(中工業), 대공업 내지 중공업(重工業)으로 발전해나감이 정칙(定則)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1770년대의 영국 산업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가서, 약 200년 전의 코스를 하나하나 밟아 내려올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다.
(...) 우리는 너무나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 우리는 과감하게 그 순서를 바꾸어 대기업에서부터 출발하여, 중소기업으로 내려가는 방식을 취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회장이 쓴 '우리가 잘 사는 길'은 크게 3가지 지점에서 매우 놀랍다.
첫째, 경제발전 전략에 대한 명료한 입장이다. ①경제학을 전공하는 것 ②기업 경영을 하는 것 ③한 나라의 경제발전 전략을 제시하는 것은 각기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한 나라의 경제발전 전략을 다루려면 훨씬 복합적인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한다.
이 회장의 전문을 보면 서양의 경제발전 과정과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이 달라야 함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절대 빈곤 상태에 있는, 후발 국가인 한국적 현실에서 바람직한 경제발전 전략은 공업 우선, 수출 중심, 외자 유치, 대기업 우선으로 집약된다.
둘째, 글 내용이 갖는 용감함이다. 1963년 5월은 민정 이양이 이뤄지기 전이다. 다시 말해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나라를 통치하던 시점이다. 그런데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추진했던 ‘부정축재자 처리’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게다가 기업인으로서 소신 발언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셋째, 글이 기고된 ‘시점’이다. 이 지점이 가장 중요하다. 1963년 5월 30일부터 6월 5일까지 연재됐다. 한국경제사에서 1963년은 ‘경제발전 전략의 혼란기’였다. 1963년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1963년 이전과 1963년 이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1963년 이전’ 상황이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벌어진다. 당시 가장 잘 나가는 기업인 12명에 대해 부정축재자 처벌을 추진한다. 1962년 6월에는 화폐개혁을 단행한다. 화폐개혁 정책의 핵심은 3가지였다. 첫째, 화폐 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꿨다. 둘째, 10환은 1원으로 교환됐다. 교환비율은 10 대 1이었다. 셋째, 구권을 신권으로 교환할 경우 ‘산업개발공사’의 주식이 강매됐다. 한마디로 ‘강제적 자본조달’을 통한 기간산업 육성 정책이었다. 이는 당시 제3세계 좌파 민족주의 정권이 흔히 사용하는 정책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군사 정부는 1961년 부정축재자 정책도 실패하고, 1962년 화폐개혁도 실패한다. 쿠데타는 했지만 경제는 엉망진창이었고, 경제발전 방향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다음으로 ‘1963년 이후’ 상황이다. 크게 두 가지 변화가 발생한다. 1964년 박정희 정부는 수출 노선을 본격화한다.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한다.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의 무상원조, 2억 달러의 유상원조, 1억 달러의 상업차관을 받게 된다.
정리해 보면, 1963년 이 회장이 한국일보에 기고한 '우리가 잘 사는 길'은 이후 박정희 군사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회장은 당시 가장 잘나가고, 가장 유명한 기업인이었다. 이 회장의 기고문 이후, 박정희 정부의 경제발전 전략은 ①(농업이 아닌) 공업 우선 ②(국내 중심이 아닌) 수출 중심 노선 ③(내자 유치가 아닌) 외자 유치 중시 ④(중소기업이 아닌) 대기업 우선을 분명히 하게 된다.
1963년, 이 회장은 왜 ‘한국의 경제발전 노선’을 제시할 정도로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었을까?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 회장 본인이 경제의 최전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경제의 발전 방향에 대해 그 누구보다 많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는 지금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미중패권 경쟁, 글로벌밸류체인(GVC)의 급진적 재편, 급진적인 에너지 전환, 인구구조의 급진적 재편 등이 그러하다. 이를 돌파하려면 기업인, 정치권, 시민사회가 새로운 차원에서 협력하는 게 필요하다.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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