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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홀 재난 속 기적을 일으킨 건, 초능력 아닌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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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과 로봇, 우주가 더는 머지않은 시대입니다. 다소 낯설지만 매혹적인 그 세계의 문을 열어 줄 SF 문학과 과학 서적을 소개합니다. SF 평론가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해 온 심완선이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기차역에 도착하니 평일 오후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인파가 몰려 있었다. 캐리어를 쥔 자들이 축축한 냄새를 풍기며 우두커니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얼른 그 대열에 합류했다. 열차가 출발할 시간인데도 전광판에 아무런 탑승 안내가 뜨지 않았다. 순간 운행이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한국철도공사는 일반열차를 모두 정지하고 KTX만을 일부 운행하겠다고 밝혔다. 전국적인 ‘극한 호우’ 때문이라고 했다. 그나마도 안전을 위해 감속 운행하니 평소보다 지연될 수 있다고도 했다.
기차가 도입되었을 시절, 그런 대단한 물건이 시간표대로 정확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근대의 찬란한 성취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지금은 앱을 켜면 각종 교통수단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예측가능성과 통제가능성에 익숙하다.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가 차를, 도로를, 도시를 얼마나 신뢰하는지조차 잘 모른다. 그 깊이는 신뢰가 깨질 때 드러난다.
얼마 전 오송 지하차도에서는 침수로 인해 14명이 사망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집계에 따르면 이번 집중호우로 인한 사망자는 44명, 실종자는 6명이었다. 기차의 호적소리가 신뢰를 견인했다면, 기차가 오지 않을 때의 묵음은 무엇이 무너지는 소리인 걸까.
몇 년 전에는 땅이 무너지는 것이 제일 무서웠다. 지반에 구멍이 발생해 지표면이 꺼지는 현상을 싱크홀이라고 한다. 문목하의 '돌이킬 수 있는'에서는 수원에 발생한 초대형 싱크홀이 4만여 명의 목숨을 삼킨다. 다만 현실과 달리 수원 싱크홀의 원인에는 외계의 물질이 관여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초능력을 얻는다. 능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대상을 부수는 파괴자, 대상을 멈추는 정지자, 대상의 방향을 되돌리는 복원자. 생활 기반이 무너진 다음에 뭉친 사람들은 비정해지고 또 애틋해진다. 여기에는 배신과 대립과 비밀이 있다. 주인공 윤서리의 이야기는 반전을 거듭하며 규모를 키운다.
그리고 신뢰의 문제, 사람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신뢰가 나온다. 싱크홀 때문에 땅 밑에 떨어진 생존자들은 초능력으로 계단을 만들어 탈출한다. 마지막 사람은 8년이 지나서야 계단을 오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큰 기적은 제가 8년 동안 죽지 않았다는 게 아닙니다. 제가 올라왔다는 사실입니다. …대체 왜 8년이나 그 다리를 놓지 않고 붙들어놓을 생각을 했을까요. …한 사람이라도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 몇 년이 지났더라도, 생존자가 올라올 가능성이 한없이 제로에 수렴해도 희망을 놓기 싫었을 테니까요. 실제로 저는 이경선이 그 희망을 놓지 않은 덕분에 계단을 타고 올라와 살았습니다.”(318쪽)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을 얻은 이들의 이야기는 서늘하게 시작해 강렬하게 끝난다. 희생과 신뢰와 사랑과, 재난과 죽음과 슬픔이 섞이는 덕분이다. 그리고 ‘돌이킬 수 있는’은 우리가 그 모든 이야기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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