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경기 시흥시 시화호수 옆에 놓인 순백의 상자 같은 집. 노을이 드리운 여름 저녁이 가장 아름답고, 눈 내리는 겨울도 장관이라는 집은 보슬비가 흩뿌리는 날도 인상적이었다. 바다인지 호수인지 비구름인지 모를 희뿌연 배경의 일부가 된 듯, 그러나 산뜻하고 명료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집. 시화호를 바라보는 '시흥 J주택'(대지면적348㎡, 연면적 211㎡)의 첫인상이다.
이 집은 23년 차 캐릭터 디자이너 성하나(52) 고성은(46) 부부의 살림집이자 일터다. 부부는 이곳에서 살며 캐릭터 회사 '아이폼'을 운영하고 있다. 교육사업을 해오다 5년 전 직접 만든 몬스터 '토마몬'으로 캐릭터 사업을 시작한 부부는 생활과 일을 경계 없이 오가면서 공간에 대한 갈증을 크게 느꼈다고 했다. "정해진 시간에 책상에 앉아 있는다고 좋은 디자인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영감이 떠오를 때 몰입하면서도 숨을 쉴 수 있는 틈이 필요했어요. 시간 구분 없이 휴식과 작업, 외부 미팅을 수시로 오고 갈 수 있는 공간을 꿈꾼 것이 이 집의 시작이죠."
디자이너 부부, '호택'을 꿈꾸다
오랫동안 시흥에 살았던 부부는 살던 집 근처에 새로 개발된 택지지구를 찾았다가 지금의 터를 만났다. 그리고 가능성을 단박에 알아봤다. 호수 옆에 집을 짓고 재택근무를 하는, '호택'의 가능성 말이다. 아내 고씨는 "땅을 찾아다니다 운 좋게 이곳을 발견했는데 막힘 없이 호수만 바라보는 곳이니 오래 살고 행복하게 일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며 "꿈꿔왔던 자연 속 작업실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고 떠올렸다.
부부는 지체 없이 오래전부터 선망하던 황준(황준 건축사사무소 소장) 건축가를 찾아갔다. "남들은 집을 짓기 전에 건축가를 많게는 수십 명 만난다는데 우리는 첫 만남에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어요. 황 소장님의 군더더기 없는 주택 스타일이 자유분방하고 다채로운 우리 작업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건축가 역시 호수 바로 앞에 있는 집터를 찾은 첫날 머릿속에 일필휘지로 설계안을 그렸다고 한다. 황 소장은 "보통 설계에 수개월이 걸리는데 이 집은 받은 영감이 설계의 기본이 됐다"며 "호수를 나란히 바라보며 일과 생활의 균형을 잡는 집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그려졌고, 그 안이 거의 그대로 구현됐다"고 했다.
그리하여 시원하게 열려있는 호수 뷰는 이 집의 중심이 됐다. 현관에서 첫 걸음을 디딜때 호수로 향하는 시선은 집의 어느 공간에 있든 호수로 연결된다. 주방과 거실, 사무실, 침실, 계단이 남측 호수를 바로 보고, 복도와 계단를 움직일 때도 공간 사이사이 중첩된 창문으로 호수가 보인다. 현관에서부터 60㎝, 80㎝로 차례로 단차를 올려간 덕분에 같은 풍경이라도 위치에 따라 다채롭게 담긴다. 이것이 건축가가 첫날 얻은 '영감'의 결과일 테다.
호수를 품은, 작은 도시의 탄생
호숫가 옆 외딴집은 얼핏 하얀 상자를 연상케 한다. 단순명료한 사각 형태와 선명한 백색, 짙은 회색 가벽과 담장이 조화를 이루며 모던하면서 견고한 인상을 풍긴다. 그중에 얇고 긴 틈을 새겨 넣은 가벽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이에 대해 황 소장은 "가벽을 하면 일단 현관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대신 현관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밖이 보인다"며 "이렇게 긴 슬릿이 나 있어서 집에서 나오는 사람은 밖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데 밖에서는 안이 안 보이는 콘셉트"라고 설명했다.
단순한 외관과 달리 내부로 들어가면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공간이 얽혀있다. 호수의 방향과 가장 좋은 경치를 담을 수 있는 프레임, 그리고 공간의 기능이 자연스럽게 순환할 수 있는 구조를 고민한 결과다. 건축가는 "도시는 큰 집과 같고, 집은 작은 도시와 같다"는 르네상스 건축가의 말을 인용해, 집을 '도시'에 비유했다. "이 집은 다른 주택과 달리 일을 하는 곳도 있고, 잠을 자는 곳도 있고, 밥을 먹는 곳도 있는 작은 도시 같은 건물이에요. 일단 걸어 다니는 곳도 많고, 그 걸어 다니는 곳을 통해서 작은 도시를 왔다갔다 하는 느낌을 내려고 했죠."
작은 도시의 입구로 들어가면 자연스레 생활 영역과 업무 영역이 나뉜다. 중앙 복도를 기점으로 왼쪽으로는 부부가 생활하는 살림집이, 오른쪽으로 틀면 디자인 작업과 미팅을 하는 사무공간이 자리한다. 복도와 계단은 동선을 고려해 집의 가운데 놓았단다. 마치 도시에 길을 내듯 중심축을 중심으로 순환하는 양방향 동선을 만든 것. 남편 성씨는 "계단이 두 개인데 살면서 신의 한 수라고 느끼는 대목"이라며 "면적이 넓지 않지만 동선이 다양해 두 영역을 넘나드는 재미가 있고, 집이 역동적으로 느껴져 지루하지가 않다"고 흡족해했다. 도시의 가로등과 유사하게 제작한 조명도 이 집만의 디테일. "주택엔 천장에 조명을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집은 간접등을 설치하고 곳곳에 가로등과 유사한 형태로 직접 디자인해 바닥에 붙였어요. 빛과 조명 등 도시의 요소를 심플한 형태로 적용했죠."
완벽하리만치 말끔하게 매만져진 선과 면의 마감도 인상적이다. 화이트와 우드 톤으로 절제된 내부 인테리어, 슬라이딩 도어로 분리한 공간, 꼭 필요한 조도와 사이즈로 제작된 조명, 간결한 계단 형태와 유리 난간의 매끈한 이음새, 벽 사이의 틈새에 설치한 거울창, "전문가 눈에만 보인다"는 문과 창의 숨은 몰딩···. 인테리어와 가구까지 설계부터 세심하게 계획된 공간에는 어디에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집의 형태는 최대한 간결하게, 내부는 몰딩의 간격까지도 세세하게 설계해요. 설계도만 백 장 이상이 나오는 이유죠."
부부가 만드는 새로운 세계
이제 막 일 년이 넘어가는 호숫가 집에서의 생활. 도시와 떨어진 사소한 불편함이나 일과 생활의 경계가 흐려지는 등 단점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만족스럽다고 부부는 말했다. 무엇보다 집은 작업장으로서 더할 나위 없다. 해가 뜨면 저절로 눈이 떠지는데, 그때부터 조용히 책상에 앉아 몇 시간이고 오롯이 작업만 집중할 수 있다고. 작업에 최적인 채광과 자연의 소리를 배경 삼아 부부가 매만지고 있는 캐릭터의 이름은 토마몬. 먹다, 마시다란 뜻의 스페인어 'tomar'와 괴물이란 뜻의 영어 'monster'를 합친 말로 걱정을 먹어주는 몬스터라는 뜻이다. 걱정을 먹어치우는 캐릭터 10마리를 잘 키워서 조금이나마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주고 싶다는 아내 고씨는 "캐릭터들이 이 여유 있고 아름다운 집에 오면서부터 조금씩 더 여유 있고 유쾌하게 변하는 게 느껴진다"며 웃었다.
이 집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부부는 삶이자 업이된 주택 생활을 터득해가고 있다. 어디든 앉기만 하면 초연한 풍광에 마음을 빼앗겨 좀처럼 일어서지 못하는 공간, 집 밖으로 나가면 바로 바다인 듯 드넓은 호수를 볼 수 있고, 저녁에는 붉은 노을이라는 장관이 펼쳐지고 밤에는 별이 쏟아지는 환경을 더 잘 누리기 위해 부부는 캠핑카를 집 앞에 두고 지인들과도 호수 생활의 기쁨을 나눌 생각이라고 했다. "시끄러운 도심에서 벗어나 조용히 우리만의 세계에 몰입하고, 그러다가도 사람을 초대해서 즐기는 삶, 좋아하는 것과 일과 일상이 하나로 이어지는 생활이죠. 그걸 이뤄준 곳이 바로 이 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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