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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대세 그룹 왬, 그들은 왜 일찍 해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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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시절이 짧았다. 등장하자마자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혜성 같은’이란 표현이 어울렸다. 신인 그룹으로 주목받더니 바로 정상에 올랐다. 구성원들의 나이는 고작 20세. 동갑내기 친구 둘이 결성한 그룹 왬의 앞날은 밝고도 밝았다. 하지만 결성 5년 만에 해체됐다. 슬럼프가 문제는 아니었다. 구성원 간 심한 갈등이 있지도 않았다. 왜 그들은 인기 정상에서 결별하게 된 걸까.
앤드루 리즐리(60)와 게오르기오스 키리아코스 파나요투(1963~2016)는 10대 시절부터 친구였다. 친형제처럼 붙어 다니던 둘은 음악이란 공통분모를 지녔다. 음악에 대한 열정은 리즐리가 강했다.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파나요투는 음악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1981년 리즐리 주도로 10대 후반이던 두 사람은 그룹을 결성했다. 리즐리가 클럽에서 놀다 외쳤던 감탄사 ‘왬(꽝이라는 의미)’이 그룹 이름이 됐다. 가내수공업 형식으로 녹음한 노래를 음반사에 보냈다.
1982년 음반이 나왔다. 파나요투는 예명으로 조지 마이클을 사용했다. 1983년에는 첫 번째 앨범 ‘판타스틱’을 발매했다. ‘판타스틱’은 영국 앨범 차트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신인그룹 왬은 빠르게 정상급 그룹으로 도약했다. 활동 초반에는 리즐리가 작사 작곡을 주도했으나 마이클이 조금씩 재능을 드러냈다.
상승세는 멈추지 않았다. 신곡을 내놓을 때마다 이전보다 더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마이클은 작사 작곡 능력뿐 아니라 프로듀서로서의 자질까지 보였다. ‘죽의 장막’을 막 거둔 중국에서 서방 가수 최초로 공연하는 기록을 만들기도 했다.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될수록 마이클은 고뇌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남성 그룹들이 그렇듯 왬 역시 소녀 팬을 주요 공략층으로 삼았다. 리즐리나 마이클의 의도와는 무관했다. 음악산업이라는 트랙 위에 올라서는 순간 업계의 작동방식을 거부할 수 없었다. 마이클은 특히 여성 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는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이성애자처럼 행동해야만 했다. 자신을 향한 조명이 강해질수록 마음속 어둠이 짙어졌던 셈이다.
다큐멘터리는 한때 대중음악계를 평정했던 왬의 활동 5년을 세밀히 들여다본다. 여러 자료 영상과 더불어 두 사람의 회고가 곁들여진다. 7년 전 세상을 떠난 마이클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활동 당시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들려준다. 당대 음악계 생리에 대한 고찰이나 비판은 딱히 없다.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벼락 스타가 됐던 두 사람이 남몰래 겪었던 심적 어려움에 초점을 맞췄다.
리즐리와 마이클이 인기 절정인 상황에서 왬을 해체하고 행복하게 결별할 수 있었던 건 각별한 우정 덕분이다. 리즐리는 마이클의 마음고생을 익히 알고 있었고, 왬 활동이 오래 지속될 수 없음을 간파했다. 그는 점점 자신 대신 마이클에게 시선이 집중돼도 딱히 질투하지 않았다. 친구의 재능이 세상으로부터 제대로 인정받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마이클이 고교 시절 만들었던 왬의 히트곡 ‘케어리스 위스퍼’를 음반 프로듀서가 과소평가했던 일 등 뒷이야기들이 꽤 재미있기도 하나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드는 건 두 친구의 따스한 우정이다.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평론가 91%, 시청자 89%
***한국일보 권장 지수: ★★★★(★ 5개 만점, ☆ 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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