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망부석'의 빈자리

입력
2023.07.13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지난 1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청사 입구 모습. 청사 안으로 이어지는 인도 초입에 서서 항상 1인 시위를 벌이던 이른바 '서초동 망부석' 민원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정재호 기자

지난 1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청사 입구 모습. 청사 안으로 이어지는 인도 초입에 서서 항상 1인 시위를 벌이던 이른바 '서초동 망부석' 민원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정재호 기자

검게 그을린 피부의 깡마른 중년 남성. 법조인들에게 '서초동 망부석'이라고 불렸던 그에 대한 정보는 제한적이다. 가족에 대한 검찰 수사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청사 출입문 앞에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시작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 외의 소문은 중구난방이다.

혹자는 "피켓에 쓰인 사건의 법률적 구성 요건이 부실해 해결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또 다른 이들은 "민원이 이미 해결됐음에도 '검찰에 대한 불신'이 사라지지 않아 그 자리를 지킨다"고 말했다. 과거 몇몇 기자들이 그를 취재하려 했으나 망부석의 육성을 길게 들어본 이도 드물었다. 대답 대신 조용하고 낮은 시선만 검찰청사를 향했을 뿐이었다.

망부석의 시위가 언제 시작됐는지 역시 모호하다. 분명한 건, 그의 시위가 최소 10년은 이어졌다는 사실뿐이다. 그의 모습은 2008년 초 법조팀 기자로 청사를 처음 출입했던 당시부터,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19년 말까지 나의 시선에 오롯이 담겨 있다.

망부석의 시위 방식은 한결같았다. 그는 출입기자들도 잘 모르는, 고검장과 지검장 등 고위 검찰 간부의 차량이 청사로 드나들 때마다 피켓을 차량을 향해 들어 보인 뒤 고개를 깊게 숙였다. 점심시간, 수많은 인파가 오고 갈 때도 귀신같이 고위직 검사들에게만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검찰이 제대로 수사해 달라!" 그가 소리 내 외치진 않았지만 그의 침묵을 본 누구라도 '소리 없는 아우성'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19 시대가 종식되자 그는 다시 중앙지검 앞에 섰다. 그러나 건강 문제일까. 이전처럼 매일 그를 보긴 어려워졌다. 대신 망부석이 비운 자리 주변은 형형색색의 수많은 현수막이 채우고 있다. 본인들의 수사에 억울함을 호소하던, 소수의 현수막이 간헐적으로 걸리던 시절이 무색한 풍경이다.

현재 서울중앙지검과 대검찰청 사이에 위치한 반포대로에 걸린 현수막은 총 19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의 수사를 촉구하는 한 정당의 현수막은 11개이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녀 특혜 채용 의혹 관련 압수수색을 요구하는 정당 현수막도 5개나 된다. 나머지 현수막에는 "후쿠시마 핵폐수, 정말 마실 수 있나요" 등 검찰 수사와 무관한 구호가 가득하다.

현수막들이 더 눈에 밟히는 건 서슬 퍼런 문구들 때문이기도 하다. 현수막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썩어버린 선관위", "수사를 언제까지 뭉갤 거냐"고 외친다. 그들이 바라는 대로 검찰이 움직이지 않으면 나라가 결딴이라도 날 것처럼 위협적이고 거칠다.

표현 및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한 한국이기에 이들의 현수막 시위는 위법하지 않다. 하지만 검찰에 특정 행위를 정치적 의도로 강요하는 건, 검찰 조직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공정'의 영역을 교란시킬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다고 모두가 서초동 망부석과 같은 시위를 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고 할 필요도 없다. 핵심은 "깨어 있는 정신으로 검찰을 지켜보고 있다"는 명징한 사회적 압박이 지속돼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한 길에는 시민들과 함께 언론과 시민단체·정당이 각자 맡아야 할 역할이 있을 것이다.

감정만 자극하는 거친 대응이 정답일 수는 없다. 일방적 요구가 일상이 되어버린 풍경 또한 변화의 동력이 되기 어렵다. 때로는 망부석이 그러했듯, 차분한 진정성이 거친 훈계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는 법이다.

정재호 사회부 법조팀장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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