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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제일' 표식 앞에서의 인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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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이야." 배우자가 한숨 쉬듯 말했다. 배우자는 혼자 사는 어르신 집에 방문해 안부를 살피고 간단히 집 정리를 도와주는 돌보미 사업에 지원했다. 사업 담당자는 돌보미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했는데 돌보미 혼자 어르신 댁에 방문해야 한다고 안내했다. 대부분 중년 여성으로 이뤄진 돌보미들은 불만을 터트렸다. 남성 혼자 사는 집에 여성 노동자 한 명이 홀로 들어가야 하는 게 불안하다는 항의였다. 교육 참여자 중 한 분은 성희롱 경험이 있다며 혼자는 절대 못 가겠으니 2인 1조 근무를 요구했다고 한다. 배우자와 동료 노동자들의 불안한 감정이 이해가 가면서도 주휴수당도 주고 싶지 않아 15시간 미만으로 일을 시키는 기관이 2인 1조 근무를 허용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가 후회했다. 불안함에 일을 그만두면 예민하고 무책임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싫을 테고, 일을 하다 문제가 생기면 개인 책임으로 돌릴 게 뻔했다.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라는 지긋지긋한 말도 떠올랐다. 우리는 항상 차악의 선택지 안에서만 고민해야 할까?
2019년 울산의 한 가스점검원이 가스검침을 위해 고객 집에 방문했다가 감금당했다. 다행히 탈출했지만,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자살을 시도했다. 가스점검 노동자들은 고객이 알몸을 노출해도 회사는 '집 안에서 둘 간에 벌어지는 일'로 치부하며 책임을 회피한다며 분노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경동도시가스서비스센터분회는 2인 1조 근무와 처우 개선을 위해 파업을 벌였고 관할 지자체인 울산시청 옥상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다 연행되기도 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굴하지 않았고 결국 2인 1조 근무와 성과급제 폐지를 쟁취했다. 성과급제 아래에서 가스검침원은 홀로 1,200가구를 관할하면서, 97% 이상의 가구를 점검해야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성과급의 압박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서도 고객의 문을 열었고 갑질을 당하더라도 빨리 문을 닫고 나와야 했다. 노동자의 근무환경은 시민의 안전과도 연결된다. 노동자들은 2인 1조로 일할 때, 70%의 점검률을 기록했지만 20~30건씩 가스누출을 잡아냈다. 반면 98%의 점검률을 기록한 1인 근무자는 가스누출을 발견하지 못했다. 회사에서 실적을 위해 허위보고를 유도했기 때문이다. 기업은 비용 때문에 2인 1조 근무를 반대하겠지만, 써야 할 돈을 쓰지 않은 대가는 노동자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이다.
지난 6월 한 아파트에서 홀로 승강기를 점검하던 노동자가 7층에서 지하 2층으로 추락해 숨졌다. 2인 1조 근무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승강기 앞에는 '안전제일'이라고 적힌 노란색 바리게이드가 쳐졌다. 배달하다 이 표시를 봤다면 손님이 승강기가 고장 난 걸 알면서도 배달을 시켰다는 생각에 화부터 났을 거다. 내 노동의 어려움에만 천착하는 동안 노란색 경고판 뒤에서 일하는 사람의 존재를 생각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안전제일'이라는 문구를 치우고 동료가 죽은 현장으로 들어가 승강기를 고칠 것이다. 승강기는 복구되고 주민의 불편함도 사라질 테지만 위험한 근무환경은 고쳐지지 않을 것 같다. '안전제일'이라는 바리게이드가 쉽게 치워지지 않기를 우리의 불편함이 빨리 해소되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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