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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된 성범죄 피해자들... 지적장애 엄마는 왜 '베이비박스'를 찾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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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가을, 남루한 차림의 70대 노인이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 문을 두드렸다. 노인 곁엔 고개를 푹 숙이고 주변을 살피는 30대 여성 A씨가 서 있었다. 사연은 이랬다. 여성은 아기 엄마이자 노인의 늦둥이 딸로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지능을 가진 지적장애인이었다. 여성은 평소 식당 설거지 같은 소일거리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하지만 일터에서 만난 남성들은 A씨를 수차례 강간했고, 벌써 네 번째 출산이었다. 노모는 앞선 세 아이의 거취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를 맡긴 채 떠났다.
정부가 조만간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미신고 영ㆍ유아’들을 전수조사한 결과를 내놓는다. 조사 결과와 별개로 이 사건이 불거졌을 때부터 논란이 된 사안이 있다. ‘베이비박스’에 갓 태어난 아기를 유기한 엄마들이다. “아무리 그래도 자식을 버리는 건 천륜을 거스른 행위”라는 비난과 “아이를 살리려는 마지막 선택지”라는 동정론이 혼재했다.
그러나 엄마가 또 다른 범죄 피해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적장애 여성들이 그런 경우다. 성폭행을 당해 원치 않은 임신을 했지만, 낮은 인지능력 탓에 신고조차 어려운 이들을 일반 유기 범죄와 동일선상에서 처벌할 수 없는 이유다.
이종락 주사랑공동체 목사는 2009년 베이스박스를 만든 후 지적장애 엄마 5명을 만났다. 모두 강요나 꾐에 의해 임신을 해 아기를 데려온 범죄 피해자였다. 수년 전 직장동료 손에 이끌려 이곳을 찾은 한 지적장애 3급 산모는 “이웃주민이 ‘예쁘다’며 다가와 밥과 술을 사주길래 성관계를 했지만 금세 연락이 끊겼다”고 털어놨다.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은 중절 수술이 가능하다. 주변에 피해를 알리고 빨리 대처했다면 출산까지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적장애인들은 스스로를 범죄 피해자로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성폭력상담소 상담과 경찰 고소장 등 수술에 필요한 범죄 사실 증명은 언감생심이다. 2015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보고서에서 이미정 연구위원은 “지적장애인은 성범죄 인식이 부족해 조기 개입이 어려운 특성 있다”고 분석했다. A씨 어머니 역시 딸의 임신 사실을 출산 무렵이 돼서야 알았다.
넘어야 할 산은 이뿐만이 아니다. 아이를 보육시설에 맡기려면 친부모가 실명으로 출생신고를 해야 한다. 직접 양육을 선택했을 때 주어지는 장애한부모 지원 혜택도 지적장애 여성이 홀로 육아를 도맡기엔 충분치 않다. 이 목사는 9일 “비장애인 산모들도 출산 기록을 남기길 꺼리는데, 범죄 피해로 낳은 아이를 ‘내 자식’으로 신고하긴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물론 범죄 피해자라 해서 무조건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다만 영아 유기를 막을 만한 제도적 안전장치가 충분한지는 따져봐야 한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7~2021년 발생한 여성 장애인 상대 강간ㆍ간음 사건은 1,504건에 이를 만큼, 이들은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지적장애 여성들의 부족한 상황 인식과 대처 능력, 빈곤한 양육 환경 등을 고려하면 사회복지 차원의 지원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영아 유기ㆍ살해 부모의 처벌을 강화하려는 ‘엄벌주의’도 신중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김학범 세명대 경찰학과 교수는 “지적장애인이 영아유기죄나 살해죄의 존재를 알고 범행하는 사례는 드물다”면서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촘촘한 사회적 대책 마련이 예방에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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