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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부러울 때 떠올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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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란 무엇인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제주도에 산다는 것만으로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니 말이다. "제주도 사니까 좋지? 부럽다!" 사람들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부러워한다. 제주도란 관광지이기에 얼마간 이해하지만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지 않나, 한편으로 퍽 억울한 데가 있다. 또, 책방이란 무엇인가. "나도 나중에 책방이나 하면서 살고 싶어!" 좋아하는 책과 나의 손길이 가득 찬 공간을 꾸리고 지속하는 경험, 물론 멋지고 재밌어 보일 수는 있겠다. 그런데 책방이면 책방이지 책방'이나'는 뭔가. 턱을 괸다. 쉽고 편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일까. 부러움이란 무엇인가.
제주도에서 책방을 운영하며 이제는 더 이상 하지 않으려는 말이 있다. 바로 '부럽다'라는 말이다. 부럽다는 말을 들어오며 떠올린 상념이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좋아 보인다는 뜻일 테니 칭찬이라고 여기며 "감사합니다" 대답할 때가 대부분이지만 미묘한 차이로 그 말이 불편할 때가 있다. 도대체 왜 불편하기까지 한 것인지 마음이 복잡하던 중, 한 작가가 제주에서 잠시 지낼 때 써낸 한 대목에 깊이 공감했다. "부러움을 살 만큼 특별하거나 안정된 날을 보내고 있지 않은데도 부러움을 받으면 나만 삶의 어둠을 모르는 철부지가 된 것만 같아진다. 그 말을 하는 대신 내가 가진 삶의 나쁜 점마저도 떠안겠느냐고 묻고 싶다." (송재은, '오늘보다 더 사랑할 수 없는') 그렇다.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보고 쉽게 판단해 버리는 태도에서 비롯된 '부럽다'는 어쩐지 좋게 들리지 않는 것이다.
부러움에 관한 기억 하나. 중학생 시절 수영을 잘하는 친구를 따라 무작정 수영장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 당시 수영 경력이 몇 년쯤 된 친구는 상급반에서도 상급이었고, 나는 이제 막 초급반에서 발차기를 배우고 있었다. 삐걱대는 나와는 달리 자유롭게 물살을 가르는 친구가 부러웠다. 자유형 팔 돌리기를 배우던 어느 날, 팔과 고개를 돌리며 수면 위로 숨 쉬는 연습을 하다가 한없이 의아해졌다. '어떻게 이 자세로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는 거지?' 아무리 연습해도 가라앉기 일쑤였다. 답답함에 친구에게 어려움을 토로하자 친구는 내게 한번 자기 앞에서 해 보라고 했다. 내 몸짓을 몇 번 보던 친구는 무언가 잘 말해주려고 입을 요리조리 움직이다가 가장 최선의 말을 찾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계속하다 보면 될 때가 있을 거야." 그러고 유유히 다시 자신의 헤엄을 치러 갔다.
그건 당시엔 알쏭달쏭한 말이었지만 수영을 곧잘 하게 된 지금은 안다. 배운 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건 금방일지 몰라도 몸이 익히기까지는 오래도록 연습해야 한다는 사실. 그건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스스로 해내야 한다. 이제는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을 봐도 부럽지는 않다. 더 정확히는, 부러워하기엔 염치없다는 생각이다. 그는 그만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저만큼의 실력에 도달했을 것이니. 누군가의 결과만을 욕심내면서 게으르게 질투하는 대신 과정을 고찰하며 나만의 속도로 잘 가보자고 다짐할 뿐.
누구에게나 각자의 세월과 사연이 있기 마련이라 타고난 조건 같은 것도 부러워하지 않으려 한다. 따지고 보면 밥 세 끼 안 굶고 건강한 것만 해도 아주 감사할 일 아닌가. 부러운 마음보다는 감사한 마음으로, 오늘에 누릴 수 있는 걸 차근차근 해 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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