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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노래'로 세상을 매혹시킨 과학자

입력
2023.07.10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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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양 포유류학자 로저 페인은 혹등고래들이 내는 소리에서 언어(노래)적 패턴을 분석, 71년 '혹등고래의 노래'란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논문과 70년 동명의 음반으로 국제 상업포경 반대운동과 해양생태운동이 본격화했다. 그의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가설은 이후 다수 연구를 통해 과학적으로 검증됐고, 인류 역사상 가장 야심찬 종간 소통 프로젝트로 불리는 'CETI 프로젝트'로 구체화됐다. 그는 고래의 미래가 인류의 미래라 여겼다. rogerpayne.com

미국 해양 포유류학자 로저 페인은 혹등고래들이 내는 소리에서 언어(노래)적 패턴을 분석, 71년 '혹등고래의 노래'란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논문과 70년 동명의 음반으로 국제 상업포경 반대운동과 해양생태운동이 본격화했다. 그의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가설은 이후 다수 연구를 통해 과학적으로 검증됐고, 인류 역사상 가장 야심찬 종간 소통 프로젝트로 불리는 'CETI 프로젝트'로 구체화됐다. 그는 고래의 미래가 인류의 미래라 여겼다. rogerpayne.com


로저 페인(Roger Payne , 1935.1.29~ 2023.6.10)

‘혹등고래의 노래(Songs of Humpback Whales)’란 제목의 논문이 1971년 8월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렸다. 미국 록펠러대 조교수 로저 페인(Roger S. Payne) 등 저자들은 이렇게 썼다. “혹등고래들은 7~30분간 다양한 패턴의 아름다운 소리를 상당히 정확하게 반복적으로 낸다. 우리는 그 일련의 소리를 ‘노래’로 명명한다.(…) 쉼없이 몇 시간씩도 이어지는 그 노래들은, 개체에 따라 조금씩 변주되지만, 종이 공유하는 뚜렷한 패턴을 지닌다.(…하지만) 노래의 기능은 알 수 없다.”

페인은 일년 전 논문의 원 데이터 즉 고래의 소리를 34분 분량의 LP음반으로 먼저 발표했다. CRM레코드 레이블 음반에는 솔로 곡(Solo Whale)과 ‘세 마리 고래들의 여행(Three Whale Trip)’이란 트리오 곡, 구슬픈 정조의 느린 곡(Slowed-Down Solo Whale), 고음이 돋보이는 곡(Tower Whales) 등 5곡이 수록됐다.

“작곡자도, 가사도, 춤을 위한 비트도, 엄밀히 말하자면 가수도 없이” 제작된 음반은 생경한 멜로디와 몽환적인 음색으로, 60,70년대의 격렬한 시대 사회적 함성 속에 스미며 발매 직후 10만 장 넘게 팔렸고 ‘빌보드 200’차트에도 진입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리뷰했다. “동굴 속 소리 같은 이상한 울림은 저음에서 고음으로 느리게 상승하다가, 오보에와 음을 소거한 코넷의 합주처럼 어우러지고, 백파이프의 멜랑콜리한 음색의 고음에서 으스스하게 출렁이는 흐느낌으로 이어진 뒤 침묵속으로 스러져간다.” 페인이 던진 논쟁적 가설은 음반에 대한 과학적 해설로써, 고래의 신비에 동질적 생명의 아우라를 더했다.

내로라하던 대중 뮤지션과 클래식 음악가들도 뜨겁게 조응했다. 가수 주디 콜린스(Judy Collins), 재즈 색소포니스트 폴 윈터(Paul Winter), 싱어송라이터 케이트 부시(Kate Bush) 등이 고래의 노래를 섞어 음반을 냈고, 전설의 포크 싱어 피트 시거(Pete Seeger)는 고래의 멜로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세상 마지막 고래의 노래(Song of the World’s Last Whale)’를 발표했다. 뉴욕필하모닉은 고래의 노래를 삽입해 앨런 호브하네스(Alan Hovhaness)가 작곡한 ‘그리고 신은 위대한 고래를 창조하셨다’를 70년 여름 정기공연 레퍼토리에 넣었다.

음반과 논문은 그렇게 70년대 해양생태운동, 엄밀히 말하면 상업포경 반대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페인은 음반 수익금으로 71년 선구적 해양생태운동 단체인 ‘오션 얼라이언스(Ocean Alliance)’를 출범시켰고, 반핵단체 ‘그린피스’도 상업포경 비폭력 반대 캠페인 ‘스톱 에이헙(Stop Ahab)' 프로젝트를 본격화했다. 미 의회는 72년 ‘해양포유류보호법’을 제정했고 국제포경위원회(IWC)는 상업포경 모라토리엄(82년)-전면 금지(86)를 잇달아 결의했다. 뮤지션들은 음반 수익금 전액 또는 일부를 환경기금으로 기부했고, 데이비드 애튼버러(David Attenborough)와 자크 쿠스토(Jacques Cousteau)는 고래 다큐멘터리를 잇달아 제작했다. 86년 영화 ‘스타트렉(Star Trek: the Voyage Home)’과 코믹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The Simpsons)’의 에피소드에도 ‘고래의 노래’가 삽입됐다.

고래 연구도 본격화했다. 고래의 소리에 정말 노래나 언어와 유사한, 유의미한 음향학-구문학-수학적 규칙이 있는가, 고래는 언제 왜 노래하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궁극적으로 인류는 고래의 메시지를 해독하고 그들과 ‘대화’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페인의 가설적 주장은 여러 차례 과학적으로 검증됐고, 2020년 하버드대와 MIT, 옥스퍼드대 인공지능-머신러닝 과학자와 공학자, 언어학자, 다양한 분야의 엔지니어 등이 가세한 인류 역사상 가장 야심 찬 종간 의사소통 프로젝트인 ‘세티(CETI, Cetacean Translation Initiative)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다국적 포경선들의 작살을 피해 대서양을 떠돌던 한 무리 혹등고래의, 비명이었을지도 모르는 소리에서 ‘노래’를 발견해 세상에 알림으로써 저 기적 같은 변화의 물꼬를 튼 해양 포유류 생태학자 겸 환경운동가 로저 페인이 별세했다. 향년 88세.


생업으로 고래를 잡던 이들에게 고래의 노래는 아득한 옛날부터 사냥감의 반가운 징후였다. 북극권 일부 원주민은 “행복한 표정과 복잡한 발성 기술”로 고래 종 가운데에서도 가장 매혹적인 노래를 구사한다는 벨루가(beluga)를 ‘바다의 카나리아’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고래의 소리는 냉전기인 1950년대에야, 미 해군의 공해상 구소련 잠수함 음향탐지 작전 중 처음, 우연히 과학적 공학적으로 포착됐다. 당시 해군 기술자들에게 그 소리는 “짜증나는 신호 방해음”(‘고래가 가는 곳’, 리베카 긱스, 바다출판사)일 뿐이었다.

박쥐나 나방의 반향정위(反響定位), 즉 저주파를 활용한 위치 공간 지각능력을 연구하던 로저 페인이 고래 소리를 처음 들은 것도 67년 대서양 버뮤다 해상 미 해군 작업선에서였다. 프랭크 워틀링턴(Frank Watlington)이란 음향 엔지니어가 수중 녹음용 마이크로 포착한 소리였다. 페인은 2020년 가디언 인터뷰에서, 작업선 기관 소음에 섞여 있던 색다른 ‘소음’에 “어떤 특별한 비밀이 있으리라 직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워틀링턴의 파일 3개와 당시 아내였던 동물학자 케이티(Katy)와 함께 직접 녹음한 파일들을 챙겨온 뒤, 71년 논문 공저자인 스코트 맥베이(Scott McVay)등 동료들과 질리도록 반복 청취하며, 한동안 아침 알람 시계 음향으로도 썼다. 그는 그 낯설고 복잡한 리듬과 가락 속에서 테마라 할 만한 소절이 반복된다는 걸 확인했고, 맥베이의 부인인 수학자 헬라(Hella) 등의 도움으로 그 소리를 분석해 6옥타브 음역의 수학적 악보로 검증했다. 훗날 맥베이 부부는 소리 그래프 데이터를 들고 곧장 로저 부부에게 달려가 “당신이 이 일을 평생 할 것 같으니 논문 제1저자가 되십시오”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페인은 평생 100여 차례 극지와 직도의 바다를 오가며 고래를 연구했고, 책과 논문, 대중 강연 등을 통해 고래의 대변인으로서 활약했다. 1990년대 알래스카 연안의 페인. Ocean Alliance

페인은 평생 100여 차례 극지와 직도의 바다를 오가며 고래를 연구했고, 책과 논문, 대중 강연 등을 통해 고래의 대변인으로서 활약했다. 1990년대 알래스카 연안의 페인. Ocean Alliance

20세기 화석연료 덕에 고래 잔혹사가 진정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고래기름은 1차대전기 폭발물 필수 원료(글리세롤)이자 참호전 병사들의 발 부패(참호족염) 예방약이어서 영국 등 참전국들은 국가보조금까지 지급하며 포경을 독려했고, 2차대전 태평양 전쟁 등은 해양생태계를 초유의 지옥으로 변모시켰다. 전후 획기적으로 발전한 포경 기술과 고래기름(경뇌유) 가공기술은 고래산업을 화장품 등 미용과 제약 등 분야로 확산시켜, 한 조사 자료에 따르면 60년대 지구에 존재한 대왕고래는 1,000마리에도 못 미쳤다. 1946년 국제포경위원회가 출범했고, ‘지속가능한 포경’을 위한 계절할당제가 도입됐다. 하지만 남극 포경시즌(11월~3월), ‘대왕고래단위(BWU, Blue Whale Unit)’를 기준으로 한 포획 상한선(대왕고래 1마리= 참고래 2마리= 혹등고래 2.5마리 등)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그나마도 포경선들이 더 큰 고래를 잡으면 먼저 잡은 고래를 바다에 버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구소련과 일본 노르웨이 등 일부 국가는 80년대 상업포경이 금지된 뒤로도 과학 연구 등 다양한 명분으로 포경을 지속했다.(리베카 긱스 책) 페인이 음반과 논문을 발표하던 무렵에도 고래 잔혹사는 이어지고 있었다.

로저 페인은 1935년 뉴욕 맨해튼에서 전기기술자 아버지와 비올라 연주자 겸 음악교사 어머니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첼로를 익힌 클래식 애호가여서 음악적 자극에 민감했고, 도심보다는 자연을 좋아해 센트럴파크 숲을 걷거나 롱아일랜드 해협에서 카약 타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는 하버드대(생물학)를 거쳐 61년 코넬대에서 올빼미 반향정위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터프츠(Tufts)대 연구원을 거쳐 66년 뉴욕 록펠러대 교수가 됐다. 그가 카리브해에서 겨울을 난 뒤 봄철 번식기에 북부 노바스코샤 연안으로 이동하던 한 무리 혹등고래를 버뮤다 해역에서 만난 게 67년 그 무렵이었다.

그가 고래를 처음 본 건 60년대 초 터프츠대 연구원 시절이었다. 보스턴 해변에 돌고래가 떠밀려왔다는 소식을 라디오로 듣고 호기심에 현장에 갔던 것. 그는 구경꾼들이 고래 옆구리에 자기 이름을 새기고 지느러미를 찢고 숨구멍에 담배 꽁초를 꽂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춥고 습하던 보스턴의 3월 그 밤 이후 그는 고래에게 진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고래는 성대가 없어 입술 사이로 소리를 내지 못한다. 대신 두개골 동공과 연골 등을 울림통 삼아 폐 속 공기로 소리를 만들고, 후두의 조리개 같은 틈을 넓히거나 좁혀 소리의 강약고저를 조절한다. 대개 시력이 시원찮은 고래들은 그 소리를 활용(반향정위)해 해저 수심과 지형을 파악하고, 먹잇감을 찾고, 서로 교감하며 사회적 관계를 형성-유지하고, 멀리 있는 잠재적 파트너에게 구애한다. 즉 인간이 입으로 내는 모든 소리가 말이 아니듯 고래의 모든 소리가 노래(말)는 아니다. 하지만, 페인의 주장처럼, 비교적 장시간 특정 패턴을 반복하며 내는 소리는 노래일 가능성이 있었다. 수컷 혹등고래들이 짝짓기 시즌마다 매년 거의 같은 멜로디의 소리를 반복해서 내는 게 그 방증이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판매 실적을 기록한 환경 음반으로, 70년대 이후 지구 환경-생태운동에 획을 그은 로저 페인의 70년 음반 '혹등고래의 노래'. 수중 녹음 및 음반 기술이 발전하면서 음반은 여러 차례 거듭 제작됐다. 위키피디아.

인류 역사상 최고의 판매 실적을 기록한 환경 음반으로, 70년대 이후 지구 환경-생태운동에 획을 그은 로저 페인의 70년 음반 '혹등고래의 노래'. 수중 녹음 및 음반 기술이 발전하면서 음반은 여러 차례 거듭 제작됐다. 위키피디아.

MIT 하워드휴즈의학연구소(HHMI) 신경과학자 스즈키 류지(Ryuji Suzuki) 등은 2006년 3월, 고래의 복잡한 소리 패턴을 수학적으로 분석한 뒤 음향의 주기성과 예측가능성 등 구조적 특징을 컴퓨터로 프로그래밍해 미국 음향학회지에 발표했다. 고래의 노래가 지닌 언어적 특징을 수학적으로 검증한 거였다. 스즈키는 고래가 인간과 같은 다층적 구문을 통해 초당 약 1비트 미만의 정보를 전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초당 약 10비트 정보를 주고받는 인간(영어 사용자 기준)보다는 덜 정교하지만 “일부 해양 포유류가 복잡한 방식으로 의사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결코 놀랍지 않다”고 밝혔다.

인간보다 6배나 큰 뇌를 지닌 향유고래는 모계 중심 네트워크를 형성해 무리생활을 한다. 각각의 무리는 인간 사회의 방언처럼, 저마다 조금씩 다른 코다(codas, 모스 부호에 비견되는 단위 소리 패턴)를 쓰고 그 차이로 무리를 식별하며, 어린 고래는 신생아가 언어를 익히듯 옹알거림 같은 소리로 코다를 학습한다고 한다. CETI 과학자들은 기계학습과 오디오 AI기법 등을 활용해 향유고래 무리의 노래에서 94% 이상의 정확도로 소리의 개별 주체를 식별해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탐사기술연구소와 CETI 로봇공학자들은 심해 압력과 어둠 속에서도 소리와 영상을 담을 수 있는 고래 부착용 장비를 개발, 여러 환경에서 변주되는 고래의 소리 샘플과 ‘몸짓 언어’ 등을 모으고 있다.

로저 페인은 CETI 수석고문으로 말년까지 활약했다. 그는 뉴욕동물학회(현 야생동물보호협회) 원년 멤버였고 84년 ‘천재 보조금(genius grant)’이라 불리는 맥아더재단 펠로십을 받았다. 평생 100여 차례 극지와 적도의 바다를 오가며 고래 노래를 연구하며 다수의 책과 논문을 썼고, 여러 편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간여했다. 맥아더 재단 펠로십 동료로 만나 평생 우정을 이어간, 그보다 사흘 먼저 세상을 뜬 ‘더 로드’의 작가 코맥 매카시와 남극을 여행하기도 했다. 60년 결혼한 첫 아내 캐서린 페인과 4남매를 낳은 뒤 85년 이혼했고, 91년 뉴질랜드 출신 배우 겸 환경운동가 리사 해로(Lisa Harrow)와 재혼해 해로했다.

인류의 고래 보호활동은, 냉정히 말해 사냥 규제였지 서식 환경 보호는 아니었다. 지난 세기 이후 바다는 더 빠르게 탁해지고 소란스러워졌다. 고래들에게 수중 소음은 소통의 장벽이다. CETI 과학자들의 희망처럼 언젠가 인류가 고래의 노래를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날이 오더라도, 인류는 그들의 비명만 듣게 될지 모른다.

전이성 편평상피세포암으로 투병하던 페인은 6월 5일 시사주간지 Time에 마지막 에세이를 발표했다. 그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한 구절-“당신이 배를 원한다면 사람들에게 나무를 모으고 일을 분담시키려 애쓰지 마세요. 대신 광활하고 가없는 바다를 꿈꾸게 하세요.”-을 인용한 뒤, “인류의 가장 힘든 문제들은 대부분 비인간을 포함한 타자의 목소리를 무시한 데서 생겨났습니다”라고 썼다. 그리고 이렇게 맺었다. “(50년 전 그 때처럼) 이제 다시 한번 고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최대한의 공감 능력과 창의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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