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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누명 쓰고 홀로 버틴 23일... "그래도 고마운 한국인들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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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은 날이라 메모라이즈(기억) 안 하고 싶은 거 많아요. ‘배드 드림’(악몽)이에요. 그때 진짜 몰랐어요. ‘왜 제가 교도소에 있는 건지. 지금 뭐 하는 거지.’ 지금은 ‘그냥 전부 다 잊어버리자’ 그런 생각. ‘안 좋은 꿈을 꿨어요.’ 이렇게.”
6년째 한국 생활 중인 우즈베키스탄 출신 무스타파(가명·27)
2018년 가을 스물둘 나이로 한국에 홀로 유학 온 우즈베키스탄 출신 무스타파(가명·27). 한국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그는 지난해 정보기술(IT) 기업에 개발자로 취직해 적지 않은 월급을 받으며 '코리안 드림'을 성공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본국 가족에 생활비를 보태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1월 7일 벌어진 비극으로 그의 일상은 '악몽'으로 변했다. (▶관련기사 : 살인 누명에 날아간 '코리안 드림'... 혈흔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생사를 넘나드는 큰 수술을 받았고, 살인자 누명을 쓰고, 실직당하고, 결혼식도 못 가고, 보금자리까지 잃었다.
한국일보는 지난 3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무스타파를 만났다. 반년이나 지난 사건이지만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몹시 괴로운 듯했다. 한국인처럼 검정 머리에 짙은 검정 눈썹을 가진 그의 눈은 인터뷰 내내 붉게 충혈됐다.
하지만 날벼락 같은 일을 겪고도 무스타파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는 조건 없이 자신을 도왔던 한국인들과 외로운 타지 생활을 지탱할 수 있게 한 직장 동료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내비쳤다.
무스타파에게는 동거인이 있었다. 그의 'K성공 스토리'를 동경해 지난해 9월 한국에 들어온 사촌형 압둘로흐(가명·28)였다. 이역만리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는 형제나 다름없었지만, 사건 당일 밤 사촌형은 갑자기 돌변해 무스타파의 목덜미를 흉기로 찌르고 휘둘렀다. 뒤늦게 수사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고국에서 앓던 정신질환을 숨긴 채 한국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고 병을 키운 게 화근이었다.
무스타파는 사촌형과의 몸싸움 끝에 간신히 반지하 방에서 도망쳐 내달렸다. 휴대폰도 지갑도 챙길 여유가 없었다. 목 출혈로 상반신은 이미 피 칠갑을 한 상태였다. 눈에 보이는 편의점에 급히 들어가 도움을 청했다.
"편의점 알바하시는 분이 도와줬어요. 저 휴대폰 없어서. 119 112 불러주고. 고마웠어요. 나중에 (일이 정리된 후) 좀 맛있는 거 사주려 그랬는데, 그분이 괜찮다고 했어요." 공황 상태에 빠져 어찌할 바 몰랐던 그에겐 은인이었다.
무스타파는 인근 대학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고 살아났다. 다만 1,500만 원 남짓 병원비 중 870만 원가량을 부담해야 했다. '부담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잘 냈어요. 어차피 안 내면 저 죽어야 되니까. 다른 거는 다 (감당)할 수 있어요. 돈 상관없어요, (살아서) 집 가서 가족들 볼 수 있었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기쁨도 잠시였다. 6주간의 치료와 안정이 필요했으나 입원 사흘 만에 무스타파는 영문도 모른 채 '살인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서로 끌려갔다.
당일 사건 현장에서 사촌형이 여러 차례 흉기에 찔린 채 주검으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사촌형이 무스타파를 공격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었으나, 경찰은 무스타파가 자작극을 벌인 것으로 의심했다. 수차례 혐의를 부인하고 억울하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어 보였다.
"(경찰 수사받을 때) 그냥 액셉션(Acception·수용)했어요. 'This is my destiny'(이게 나의 운명인가 보다) 이렇게."
하지만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순간, 희망이 다시 찾아왔다. 검찰이 혈흔과 지문 등 과학적 증거에 따라 사촌형의 자해 행위로 결론을 내리고 무스타파의 누명을 벗겨준 것. "(담당 검사가) 마지막에 '고생 많이 하셨어요' 위로해 줬어요."
2월 2일 석방되고 보니 연락이 두절된 아들 걱정에 어머니는 쓰러졌고, 직장에서는 무단결근을 이유로 해고됐다. 사촌형과 살던 보금자리는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트라우마' 그 자체였다.
"(구치소를) 나와서 바로 가족에게 연락했어요. '죽은 거 아니고 살았어요'라고. 자세하게 무슨 일 있었다는 건 3월에 우리나라(우즈베키스탄) 2주 갔을 때 다 알려줬어요. 마음도 쉬고 (가족) 만나서 행복했어요. 아빠는 '한국 다시 가지 마라' 그랬어요. 근데 제가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 있으면 진짜 감옥 가는데, 그 나라(한국)는 이 정도 도와줬다. 앞으로 저기에서 살고 싶어요'라고 했어요."
자신을 살인범으로 몰았던 한국의 형사사법제도에 넌더리가 날 만도 하지만, 무스타파는 도리어 신뢰감을 드러냈다. 그는 누명을 벗겨준 담당 검사 사진을 보여주자 미소 지으며 '좋은 사람'이라고 했고, 자신을 구속하고 의심했던 경찰들조차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경찰에서) 조사 세 번 받았는데, 마지막 3차 조사받을 때 아마 그 사람들(경찰)도 제가 억울하게 있는 거 알았을 거예요. 어차피 칼에 주문(지문)도 없었고요. 그 경찰들이랑 다시 만나고 싶어요. 그냥 커피 한 잔 먹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 사람들 나쁘지 않아요. (경찰들도) 어차피 일해야 해요. 할 수 없죠."
무스타파는 앙금이 없다고 했지만 '경찰과 검찰에서 조사받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뭐였느냐'고 묻자, 곧바로 "전화"라고 답했다.
"매일 다섯 번, 여섯 번 '한 번만 한 번만 (가족과) 연락시켜주세요' 말했어요." 23일을 경찰서 유치장과 구치소에서 보내는 동안 그는 고국의 가족에게도, 한국 직장에도 자초지종을 설명할 기회가 없었다. 가족과 직장에서 보기엔 말도 없이 증발한 셈이었다. 유치장 신세를 지는 동안 감내한 신체적 고통도 있었다. "너무 아픈데 누구(의료진)도 안 나와서 약(항생제)만 조금씩 받았어요."
그에게 '법적 방어권'은 사실상 보장되지 못했다. 경찰로부터 국선변호인이 선임됐다고 들었지만 얼굴조차 본 적이 없고, 영사 접견권에 대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우즈베크 대사관이 연락이 안 된다'는 말뿐이었다. 통상 외국인 피의자는 영사(주재국 내 자국민 보호가 주요 임무인 공무원)를 통해 법적 조력을 받거나 본국에 연락을 취할 수 있다.
무스타파는 수사받을 당시의 황당함과 무력감이 떠오르는 듯 "저 같은 사람 (한국에 사는 외국인 중에) 또 있어요?"라고 되물으며 답답해하기도 했다.
"아직도 제 엄마는 약간 조심스럽죠. 언제 와야 돼?(언제 우즈베키스탄에 올 거야?) 괜찮지? 마음 괜찮지? 매일매일 전화 와요. 저 혼자서 살고 있으니까 걱정해서 그래요. 그래도 저는 여기서 살 거예요."
한국이란 나라가 싫어질 법도 하지만, 무스타파의 '코리안 드림'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트라우마가 가득한 반지하 방에 돌아갈 수는 없어서 2주간 친구 집에서 머문 뒤, 지금은 서울 변두리로 이사했다. 다행히 4월 말 새로운 IT 회사에 취직해 취업 비자도 받았다. 전 직장과의 오해도 원만히 잘 풀었다.
"(전 직장 사람들과) 요즘에도 연락하고, 직원들이랑 아직 친해요. 같이 놀러 가기도 하고. 위로도 해줬어요. 좋아요. (전) 대표님이랑도 괜찮아요. 요즘에 대표님이 연락해서 '다시 여기 와서 우리랑 같이 해주면 안 될까요?' 말했어요. 그냥 감사하죠."
새로 구한 직장의 동료들도 무슬림인 무스타파의 종교를 존중해줬다. "한국 생활하다 보면 (무슬림으로서) 음식에서 좀 힘들어요. 식사 같은 건 직원들이랑 돼지 없는 쪽으로 가요. 회식 갈 때 할랄 음식점도 많이 가요. (구직 면접 볼 때) 회사에 하루 30분, 1시간 기도할 수 있냐고 물어봤어요. 회사에 기도할 공간도 제가 만들었어요. '무슬림 다 무서운 사람들이야' 생각하는 (한국) 사람도 있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도 비슷한 사람이에요. 종교만 다른 거지."
예상치 못한 수감 생활로 1월 말 고국에서 예정됐던 결혼식은 올해 가을로 밀렸다. "여자친구에게 (3월에 본국을 방문했을 때) 제가 다 (무슨 일 있었나) 설명해 줬어요. 결혼하면 같이 한국에 올 거예요. 한국 좋아요. 잘 먹고 잘 살고, 하고 싶은 것도 다 할 수 있고요. 여자친구가 한국어과를 졸업해서 나보다 한국어 잘해요." 악연이 더 큰 인연으로 이어질까. 무스타파는 행복한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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