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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일에 목숨 바친… 성삼문·김좌진·한용운의 공통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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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읍내 중심 조양로에는 김좌진 장군 동상이 세워져 있다. 조양로와 교차하는 도로 명칭은 의사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사람’을 기리는 길이다. 김좌진 장군 외에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 3·1운동 때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한용운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역사의 고비마다 옳다고 믿는 신념을 행동으로 옮긴 이들이다.
김좌진(1889~1930) 장군은 3·1운동 때 만주에 들어가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올라 사관 양성소를 설립하고 병력을 양성했다. 1920년에는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최고의 전과로 기록되는 전투다. 안타깝게도 후에 공산당원에게 저격당해 목숨을 잃었다.
생가는 읍내 서쪽 갈산면에 위치한다. 당시 부러울 것 없는 안동 김씨 부호의 집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홍성에서 이 집안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좌진은 일찍 신문학을 깨쳐 17세에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땅을 분배했다. 나라의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도 활발히 펼쳐 호명학교(현 갈산중·고등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생가 일대는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해 본채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주변에 그의 호를 딴 백야기념관과 사당, 공원을 조성했다. 생가 대청마루에 ‘청백전가팔백년(淸白傳家八百年)'이라는 글귀가 걸려 있다. 청백리 집안으로 800년을 이어왔다는 의미다. 처마에 걸린 ‘단장지통(斷腸之痛)’ 시 구절도 눈길을 끈다. 찬 서리 내리는 타국 땅에서 창자가 끊어질 듯 서글프고 아픈 마음을 읊은 시다.
인근에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스님으로서 독립운동의 길을 택한 만해 한용운(1879~1944) 생가가 있다. 1926년 간행된 시집 ‘님의 침묵’은 동명의 시를 비롯해 ‘최초의 임’ ‘잠 없는 꿈’ ‘당신을 보았습니다’ 등 90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대부분 불교적 비유와 고도의 상징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과 애족 정신이 짙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현재 복원한 초가 생가 주변에 만해체험관과 민족시비공원 등이 조성돼 있다. 생가 뒤편 야트막한 언덕으로 산책로가 나 있다. 만해의 또 다른 대표작 ‘복종’을 비롯해 이육사의 ‘절정’, 정지용의 ‘고향’, 심훈의 ‘그날이 오면’ 등 당대 시인의 대표작이 숲속에 세워져 있다. 백야와 만해 생가는 약 6km 떨어져 있다. 내포문화숲길의 갈래인 ‘내포역사인물길’ 4코스로 연결된다.
성삼문(1418~1456) 유허지는 예산군과 경계인 홍북읍 노은마을에 위치한다. 외가가 있던 곳으로 그가 태어난 집터에 사당과 제를 올리기 위한 ‘노은단’ 등이 들어서 있다. 성삼문은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 때 집현전 학자로 훈민정음 창제에 공헌했지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실패해 처형됐다. 제단 아래에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라는 단심가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의 유허비에는 선생이 이 마을에서 태어난 사실과 사육신의 절의, 현종 13년(1672) 서울 인왕산 기슭에서 발견된 신주를 이곳으로 옮긴 과정이 적혀 있다.
바로 인근에 최영(1316~1388) 장군 사당이 있다. 고려 말의 명장 최영은 1388년 팔도도통사로 명나라를 치러 출정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실패하고 후에 피살됐다. 닭제산 능선 바로 아래에 절간처럼 자리 잡은 사당에는 기봉사(奇峯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장군이 민간 신앙의 대상으로 추앙되던 흔적이다. 지역에서는 최영과 성삼문이 100여 년의 간극을 두고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지만, 이곳이 최영의 고향이라는 명확한 근거는 부족하다. 최영 장군 사당은 그의 전과가 발휘된 제주에도 있고 통영에도 있다.
사당은 주차장에서 가파른 산길을 좀 걸어야 나타난다. 집 한 채 보자고 가기가 쉽지 않다. 다만 2.3km 떨어진 성삼문 유허지까지 내포역사인물길 5코스로 연결돼 있다. 당대 인물의 기개와 절개에 의미를 둔다면 걸을 만한 거리다.
홍성 읍내와 가까운 홍북읍 중계리는 동양화가 이응노(1904~1989)가 태어난 곳이다. 17세 때까지 살던 생가와 함께 전시관인 ‘이응노의 집’, 그의 호를 딴 ‘고암 북카페’ 등이 함께 있다. 화백은 생전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도와주려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방해하려고만 했다며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했지만, 나는 남몰래 가벼운 마음으로 줄곧 그리고 또 그렸다”고 회고했다. 이 화백은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세웠고, 1967년에는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의 표현대로 ‘꼭 알맞은 높이와 크기’의 산자락에 튀지 않게 지은 전시관은 2013년 한국건축문화 대상을 수상했다. 8월 27일까지 고암 이응노 아카이브 ‘톺아보기전’이 열리고 있다. 생가 옆 아담한 연못엔 연꽃이 가득하다. 하나둘씩 벌어지는 꽃봉오리가 은은한 향기를 퍼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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