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 줄이고, 일자리 만들고, 취약계층 돕고... 버려진 자전거의 '대변신'

입력
2023.06.29 04: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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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2개 자치구서 재생자전거 제작·판매
지난해 2400대 판매... 가격 싸고 품질 좋아
취약계층 자활 목적도, 수익금 자립에 쓰여

12일 서울시 상계동 '우리동네 자전거포' 노원점 직원들이 버려진 자전거를 수거해 재생자전거를 만들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12일 서울시 상계동 '우리동네 자전거포' 노원점 직원들이 버려진 자전거를 수거해 재생자전거를 만들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흠… 체인은 영 상태가 안 좋지만, 바퀴는 튼튼하고 아직 쓸 만하네.”

진지한 표정만 보면 자전거가 아니라 꼭 아픈 환자를 대하는 것 같다. 군데군데 녹이 슬고 한쪽 페달도 빠졌지만, 자전거 기술자들은 기름때에 가려진 잠재력을 ‘매의 눈’으로 끄집어냈다. “깨끗이 세척하고 망가진 부품 몇 개만 새것으로 교체하면 다시 쌩쌩 달릴 수 있겠군.” 12일 서울 상계동 ‘우리동네 자전거포’ 노원점에서 만난 박민철 팀장과 직원들은 검수를 마치자마자 자전거 분해 작업에 들어갔다.

매장 분위기도 여느 자전거포와 사뭇 다르다. 번쩍거리는 신상 자전거는 아무리 둘러봐도 없다. 한쪽 바닥엔 바퀴들이 차곡차곡 정리돼 있고, 벽에는 각종 공구가 가득하다. 코끝에 메케한 기름 냄새도 스친다. ‘노동의 현장’이란 얘기다. 이곳 직원들은 지하철역과 대로변에 방치되거나 버려진 자전거로 ‘재생자전거’를 만든다. 구석구석 묵은 때를 벗겨내고, 부품을 재조립하고, 페달을 구를 때 뻑뻑하지 않게 기름칠을 해주고, “따르릉따르릉” 벨까지 달아주면 완성. 간단한 과정 같지만 세척 작업이 워낙 까다로워 자전거 한 대를 만드는 데 서너 명이 꼬박 사흘을 매달려야 한다.

'우리동네 자전거포' 노원점 매장 앞에 새 주인을 기다리는 재생자전거가 전시돼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우리동네 자전거포' 노원점 매장 앞에 새 주인을 기다리는 재생자전거가 전시돼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우리동네 자전거포는 서울 각 자치구 지역자활센터에서 운영한다. 노원점을 포함해 12개 자치구에 13곳이 있다. 서울시가 지난해 1년간 수거한 자전거는 1만5,000대. 그중 2,408대가 새 생명을 얻어 새 주인을 만났다. 올해도 5월까지 방치된 자전거 5,334대가 수거됐고, 재생자전거 1,240대가 팔렸다. 가격이 8만~10만 원 수준으로 저렴한 데다 품질도 괜찮아서 소비자 반응이 좋다. 박 팀장은 “외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안전에 특별히 신경을 쓴다. 직원들이 완성품을 직접 시승해 본 뒤에 판매대에 내놓는다”고 설명했다.

재생자전거는 자원 순환뿐 아니라 환경 보호에도 이롭다. 자전거 신제품 생산 시 탄소배출량을 기준으로 추산하면 지난해 재생자전거가 저감한 탄소양은 22만7,556㎏에 달한다. 하루 동안 수도권에서 출퇴근하는 자동차 6만3,000대를 줄인 효과와 맞먹는다. 재생자전거를 판매하는 온라인 자전거 플랫폼 ‘라이트브라더스’ 김희수 대표는 “젊은 세대는 소비 행위로 가치관과 신념을 표현하는 ‘가치소비’ 측면에서 재생자전거에 관심을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 일대에서 수거된 자전거들이 집하장에 놓여 있다. '우리동네 자전거포'는 길거리나 공원에 버려진 자전거를 수리해 재생자전거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서울 노원구 상계동 일대에서 수거된 자전거들이 집하장에 놓여 있다. '우리동네 자전거포'는 길거리나 공원에 버려진 자전거를 수리해 재생자전거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재생자전거를 만드는 과정은 그 자체가 또 다른 ‘재생’이기도 하다. 우리동네 자전거포는 취약계층의 ‘자활’에 목적을 두고 있다. 직업훈련 기회와 일자리를 제공해 근로 의욕을 되찾게끔 돕는다. ‘자립’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인 셈이다. 재생자전거 판매 수익금도 자활근로자와 노숙자 등 취약계층을 위해 쓰인다.

노원점 직원들도 모두 기초생활수급자다. 2년 차 직원 임모씨는 “건강이 나빠져 큰 수술을 한 뒤 직장을 그만두고 어렵게 생활할 때 구청 소개로 이곳에 오게 됐다”고 했다. 처음엔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웠다. 육체노동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젠 전문가이자 기술자라는 자부심이 크다. 손아귀 힘이 약한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작은 힘으로도 쉽게 제동되는 유압식 브레이크를 재생자전거에 장착하게 된 것도 그의 제안 덕이었다. 그는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보탬이 되는 일이라 보람을 느낀다”며 “1, 2년 후 작은 전기자전거 매장을 여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동료 이모씨도 재생자전거를 만들며 힘겨운 시간을 버텼다. 살균기 개발 업체에서 일했던 그는 회사의 임금체불로 수년간 법정 다툼을 하면서 삶의 의지를 잃었다. 한때 집밖을 나서기도 두려웠으나, “버려진 것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며” 서서히 치유했다. 이씨는 “기술자가 기술력을 투입해 만든 제품이 제값 받고 팔려 나가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다”며 “언젠가 자립할 수 있도록 마음의 근육을 키워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각 자치구 우리동네 자전거포 담당자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공동사업도 구상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 명칭을 공동브랜드로 사용하며 상표 디자인도 개발했다. 박 팀장은 “사회복지관, 지역아동센터에 재생자전거를 보급하고, 여러 플리마켓에도 참여하는 등 재생자전거를 널리 알려 나갈 것”이라고 자신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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