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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문장, 그러나 가슴에 콕 박힌

입력
2023.06.28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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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독감에 시달리면서 '읽은 책 리뷰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때였다. 나는 약사지만 책방 운영자이기도 해서 책 소개를 하지 못한 날들이 쌓이면 유난히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설사 나에게 책에 관한 정보를 바라는 이가 생각보다 적더라도 이는 나와의 약속이자 사명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간 읽고 싶은 책들이 꽤 많이 나왔다. 오사다 히로시의 산문집 '그리운 시간들'이 그랬고, 정지돈의 소설집 '인생 연구'가 그랬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초보 아빠들의 성장일기라는 소제목을 건 '썬데이 파더스 클럽'을 집어들게 되었다. 보아하니 육아에 진심으로 임하는 아빠들이 잠정적인 육퇴(육아 퇴근) 시간인 일요일 밤 아홉 시에 뉴스레터를 발행했던 걸 모아서 낸 책이었다. 육아휴직을 낸 아빠부터 세 아이의 아빠까지 다양한 아빠들이 글을 썼고 육아에서 겪는 공감을 바탕으로 꽤 흥미로운 글들이 많았다. 내가 지금도 겪는 문제도 있거니와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보면서 '하… 인생이란'을 여러 번 곱씹으며 읽었다.

한편, 책을 읽다 보면 의외의 구절에 꽂혀서 생각이 깊어지는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희한한 곳에 멈춰서 한참 멍하니 생각을 정리했다. 미용실을 무서워하는 아들과 단둘이 미용실을 간 아빠의 에피소드인데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소재가 다 나왔다. 우는 아이, 영상과 먹을 걸로 달래는 아빠, 난감해하는 디자이너, 가끔씩 쳐다보는 손님들. 내가 몇 번을 되뇐 문장은 "물론 미용실에서 갑작스러운 울음 소나기를 우산 없이 맞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 죄송했지만"이다. 이 평범한 문장을 곱씹다 보니, 옆집, 윗집에 사는 사람도 잘 모르는 내가 얼마나 호기롭게 세상을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옛날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동네 전체가 키운다는 말도 있었는데 요즘엔 직접적인 도움이 없어서 그런지, 사회 풍조가 개인주의라 그런지 나만 잘 하면 된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동네에, 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사는가?

글쓴이가 미용실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일 거다. 그들은 낯선 이의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우는 이유를 이해하며 침묵으로 아빠를 도와주었다. 이 아빠는 죄송한 마음을 가지며 나아가서 그들에게 진 '빚'을 인식하고 있을까? 나는 잘 몰랐다. 그저 상황을 모면하는 죄송함, 감사함이 다였지 내가 이 사회로부터 암묵적으로 받고 있는 도움인 '빚'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혹시 나는 세상에 뭔가 도움 되는 일을 했을 때만 생색을 내며 빚을 강조하진 않을까?

사회가 만들어진 이후로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누군가에게 마음의 빚을 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부모님을 시작으로 내가 쓰고 있는 볼펜은, 노트북은 누가 만든 것인가? 가로수를 심은 사람은 누구인가?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서 가는 사람은 또 누구인가? 더불어 우리가 살면서 가끔 얻는 행운은 어떨까. 이 또한 모르는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것이 얽히고설켜 나에게 온 건 아닐까. 이런 빚들은 시골이나 산속에서 혼자 산다고 피해가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항상 자연에 빚을 지고 살기 때문이다.

빚이 켜켜이 쌓여서 묵직할 때 세상을 돌아보며 한번 더 가지는 감사함은 힘들게 하나의 싹을 틔워 'ㅈ'에서 'ㅊ'을 만들 것이다. 그것이 수많은 빚이 빛이 되는 순간이다.


박훌륭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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