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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조차 몰랐던 나의 이미지·정체성…두 예술가의 다정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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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요즘 춘향이가 화제다. 얼마 전 새로 공개된 ‘춘향 영정’ 때문이다. 전남 남원시 광한루원 춘향사당에는 김은호의 춘향 영정이 오랫동안 걸려 있었는데 그가 친일파 리스트에 오르면서 3년 전 철거되었다. 이후 남원시는 1억7,000만 원의 비용을 들여 새로운 춘향 영정을 제작하였다. 새로 공개된 춘향 영정을 두고 남원 지역 시민단체는 “새 영정은 춘향의 덕성이나 기품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며 거부 의사를 밝혔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새로운 춘향이가 “예쁘지 않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영정’이란 제사나 장례의 위패로서 그린 초상화다. 장례식장에 놓인 고인의 사진과 같다. 실제 인물의 초상화나 자화상 그리고 성경이나 신화 속 인물을 상상하여 그린 종교화까지 모두 인물화다. 동서양 모두 인물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실제 모습보다 ‘예쁘고 멋있게’ 그려왔는데, 유독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극사실주의에 가까웠다. 곰보 자국, 흉터, 간경화로 검어진 피부 표현까지 조선의 화원들은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사진사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런데 이번 춘향 그림은 장르가 애매하다. 실제 인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신화적 존재도 아닌데 조선시대의 전통 기법으로 그려야 하는 복잡한 성격을 지닌 그림이다. 춘향 영정은 예술을 목적으로 하는 창작품으로 보기도 애매하다. 만약 갤러리에 ‘나의 춘향’이란 타이틀로 전시되었다면 그 누구도 문제 삼지 않을 미술작품이지만 지자체가 예산을 들여 ‘민족정기’의 결과물이라며 공개했기 때문에 다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번 춘향 영정을 그림 분석하듯 평가할 생각이 없다. 아니, 엄밀하게는 그럴 수 없는 문제다. 남원시 나름의 속사정과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입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원에 거주하는 17세 여고생들의 실제 외모를 참고하여 그린 얼굴”이라는 화가의 주장에 대해 “우리 민족정기를 보여주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시민단체의 반발은 오히려 ‘외모 논란’으로 이어지면서 더 복잡한 논쟁이 되고 말았다. 나는 “어떤 춘향의 모습이 옳은가?”와는 다른 질문을 하려 한다. “여성의 이미지는 어떻게 읽히고 소비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던진 두 명의 예술가들에 대해 알아보고 영화 한 편도 함께 톺아본다면 현대미술에 대한 나름의 가이드가 되겠다. 이 글의 목적은 ‘춘향 찾기’가 아니라 ‘여성 정체성과 이미지의 관계 찾기’에 있다.
현대미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여성 정체성’이라는 말에 탁 떠오르는 예술가가 있을 것이다. 신디 셔먼이다. 셔먼은 70년대의 TV, 영화, 잡지 등 대중매체가 쏟아내는 여성 이미지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여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실험을 멈춘 적이 없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 사이에 제작한 ‘무제 필름 스틸’ 시리즈에서 셔먼은 여배우의 모습으로 분장하여 남성 중심적 시선에 자리한 여성상에 균열을 일으켰다. 이 시리즈로 셔먼은 아티스트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1980년대에는 ‘패션사진’ 시리즈, 신체 분비물이 등장하는 ‘애브젝트 아트’ 시리즈, ‘역사 초상화’ 시리즈 등으로 연이어 화제를 모았고, 1990년대에는 마네킹을 등장시키면서 ‘여성, 몸, 젠더’를 키워드로 하는 정체성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셔먼의 예술에 대한 여러 정평한 해설이 있겠지만 예술작품의 형식과 내용 면에서 각각 다음과 같은 탁월성이 있다고 정리하고 싶다.
1. 예술의 형식: 셔먼의 작업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아방가르드한(전위적) ‘개념예술’을 접목한 새로운 시도였기에 예술사적 가치가 크다. 다른 모델을 써서 장면을 연출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패러디에 지나지 않지만, 작가(주체)가 스스로 피사체(객체)가 되는 과정 자체는 모더니즘 세계를 해체 또는 전복하는 시도가 된다. 쉽게 말하자면, 셔먼의 사진이 아무런 설명 없이 가십지에 실려 있다면 우리는 그저 영화의 B컷 사진으로 볼 뿐이지만, 갤러리에 걸린 그녀의 사진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감상의 계기를 준다. 질문과 실험이 오가는 예술 작품으로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값싼 생필품이 ‘키치(kitsch)’로서 예술작품이 되는 것과 닮아 있다. 이런 이유로 셔먼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을 설명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예술가다.
2. 예술의 내용: 셔먼의 작업은 남성중심적 시선의 여성 이미지를 고발하고 저항한다. 늘 보던 익숙한 여성 이미지인데 예쁘지 않다고 느껴질 때, 심지어 불쾌하고 불편함마저 느낄 때, 감상자는 다양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를테면 르네상스 시대의 성모마리아 모습에 가짜 유방과 인형을 배치함으로써 사실성 없이 미화된 여성 이미지의 한계를 드러내는 식이다. 이러한 셔먼의 작업은 페미니즘 미술사의 큰 축이 되었다. 셔먼의 탁월성은 40년을 관통하는 일관된 메시지에 있다. “내가 누구로 보이니?”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던진 또 다른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있다. 니키 리(이승희)다. 1993년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뉴욕대학교에서 사진학 석사학위를 위해 1997년부터 시작한 ‘프로젝트’ 시리즈는 미국 예술계로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니키 리는 현재 미국의 어지간한 미술대학 현대미술 수업시간에 반드시 거론되는 아티스트이며, 그녀의 작품은 구겐하임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을 포함하여 전 세계 여러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정체성’이라는 화두는 새로운 테마가 아님에도 니키 리가 특별한 주목을 받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1. 예술의 형식: 니키 리의 ‘프로젝트’는 정지되어 있는 사진 매체를 인터랙티브(상호적인)한 예술 장르로 바꾸는 독창성이 있다. 그녀의 독특한 작업 방식 때문이다. 스스로 펑크족, 레즈비언, 여고생, 여피족, 댄서, 할머니 등으로 분장하여 그 커뮤니티 속으로 들어가 한두 달을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주변인들에게 스냅사진을 찍도록 했다. 스스로 ‘찍히는’ 방식은 셔먼의 주체와 객체 전복과 유사하지만, 장시간 타인의 삶을 실제 체험하면서 니키 리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전복시킨다. 순간포착 이미지로서의 사진이지만 동시에 한두 달 내내 상영 중인 영화인 셈이다. 정지된 사진과 움직이는 영상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면에서 니키 리의 사진은 새로운 매체가 된다. 전시장에 변기를 내놓은 뒤샹의 오브제가 미술사에서 중요한 이유가 예술 안에서 새로운 형식을 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니키 리의 ‘프로젝트’ 사진이 평범한 사진 그 이상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2. 예술의 내용: 니키 리의 작업은 ‘관계성’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정체성 탐구 영역을 확장시켰다. ‘부분들’ 시리즈는 남녀가 있는 스냅사진에서 남성 얼굴 부분을 잘라내어 피사체로서 여성만 남겨두는 작업이다. 감상자는 잘린 사진에 남겨진 여성의 표정, 의상, 배경 등의 이미지 정보를 종합하여 둘의 관계를 유추하게 된다. 곧 키스를 할 것 같은데 여성의 표정이 어둡고, 곧 포옹을 할 것 같은데 여성이 찡그리고 있을 때 감상자는 잘려 나간 나머지 부분을 채우기 위해 스토리를 지어 잘린 부분을 채우게 된다. 의도적인 삭제는 곧 주관적인 첨가로 채워진다. 가려지고 보이지 않은 다른 ‘부분들’이 있음에도 우리는 보이는 이미지로만 누군가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것과 같다.
셔먼과 니키 리의 작품이 흔하고 뻔한 것이 아니냐,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스냅사진인데 미대 출신이 찍었다고 예술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셔먼, 니키 리 모두 오히려 반기는 반응이다. 예술이라는 숭고함을 일상으로 끌어내리고, 신격화되거나 판타지가 된 여성 이미지를 해체하고, 여러 레이어로 겹쳐진 복잡하고 흔한 일상의 순간이 미술관에 전시되는 것, 이것이 현대미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줄여서 ‘에에올’)가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영화 ‘에에올’을 시청했다면 알겠지만 영화는 인내심이 필요할 정도로 어수선하고 기괴하다. 예술 형식 면에서 기존의 영화 문법을 차용하면서 내용 면에서는 한 여성을 다양한 삶 속으로 넣었다 빼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탐구한다. 주인공이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나는 지금 달랐을까?”라며 한탄했던 순간을 후회하게 만드는, 더 피곤하고 지독하게 멀티버스(다중우주)의 세계에서 온갖 다른 삶을 경험한 후 찾아온 각성, 깨달음의 지점에 이르면 이상하게 눈물이 나는 영화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러하니까. 타인의 모습을 부러워하거나 다른 공간, 다른 시간에서 살았다면 이보다 낫지 않았을까 한탄하니까. 실재하는 ‘나’는 그대로인데 그저 의상, 소품, 관계하는 사람, 언어, 지역의 다름 때문에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다를 뿐이라는 결론과 마주하면 오히려 위로와 치유가 된다. 이 경험을 주는 것이 ‘에에올’의 탁월함이다.
최근 개인적으로 좀 힘든 일이 있었다. 타인은 각자의 맥락으로 나의 이미지를 판단하고 수용하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타인의 태도와 마주할 때가 있다. 최근 논란이 된 춘향 모습에 대한 평가와 판단이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아무리 ‘예쁜 얼굴’에 대해 논쟁을 벌여도, 조명, 의상, 화장, 배경, 소품에 작은 변화를 주어도 달라지는 것은 누군가의 이미지일 뿐이다. 이것을 셔먼과 니키 리는 예술의 형식과 내용 안에서 환기시켜주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여전히 타인의 이미지를 부러워하거나 폄훼할 것이고, 여전히 다른 시공간의 삶을 상상하며 멀티버스의 세계에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가 아닌 다른 ‘나’를 욕망하며 착각을 반복하다가 종국에 깨닫게 되는 것은, 영화 ‘에에올’이 제시했듯 움직일 수 없는 돌멩이 같은 존재를 움직이게 하는 사랑 또는 다정함의 가치다. 기괴하고 낯선 셔먼과 니키 리의 사진들은 나조차 몰랐던 나의 이미지, 나의 정체성을 돌아보라고 권하며 동시에 ‘나도 그렇더라고’ 하며 잡아주는 따뜻한 손처럼 다정한 위로가 되었다. 새로운 춘향의 모습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지만 신디 셔먼이라는, 니키 리라는, ‘에에올’이라는 세계와 만나게 해 준 고마운 그림이라는 말은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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