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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을 사랑하게 만드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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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면서 언제 가장 행복하셨어요?" 나의 질문에, "지금"이라고 그는 망설임 없이 바로 답했다. 목소리에서도 얼굴에서도 웃음이 환했다. 남쪽 도시 경남 거창에서 평생 살다 89세에 서울 딸네 집으로 이주해온 지 4년 차인 '할머니'. 그는 17세에 식구 많은 집의 맏며느리로 결혼생활을 시작했고, 30대 후반에 임신과 출산을 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40세부터 두 딸을 홀로 키웠다. 혼자 되어 한 5년간 농사도 지어봤지만 고되기만 할 뿐, 아침마다 연탄가스에 취해 어질어질한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행히 그에게는 어려서부터 칭송받던 바느질 솜씨가 있었다. 포목점을 열고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 수의를 짓는 '전문가'의 시대를 열었다. 이 시대는 서울로 이주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그는 노라노와 동시대 사람이다. 노라노가 한국 최초의 패션디자이너로 영화배우와 가수, 교수를 위한 옷을 만들 때, 그처럼 지역에서 이웃들에게 꼭 필요한 옷을 뛰어난 솜씨로 만드는 전문가 여자들이 있었다)
거창에서는 5일장이 서곤 했는데, 장이 서는 날이면 전북 무주, 경남 함양·산청·합천 등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는 자신의 가게 한편에 장판을 깔고 이들을 환대했다. 이들은 그가 직접 지어 함지박으로 이어 나른 밥과 된장국을 먹고, 각자가 겪은 세상사를 나누었다. 고단하면 잠깐 눈을 붙이기도 했다. 그 옆에서 그는 쉼 없이 천을 가르고 바늘에 실을 뀄다. 그렇게 그는 옷을 지으며, 동시에 사람들과 어울려 시간과 장소의 이야기를 지었다. 여성들이 짓기의 달인이라는 말은 실제이며 동시에 은유다! 아흔을 바라보며 거창 살림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주할 때, 그의 마을 친구들은 몹시 섭섭해했다. 골목에는 그를 배웅하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엄마 평생 베푼 거 다 돌려받네" 큰딸의 말이었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홀로 살 수 없게 된 노년이 살던 곳을 떠나 자식 있는 도시로 이주할 경우, '밭에서 뽑혀 나온 무'처럼 활력을 잃는다는 경험담을 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두 딸의 걱정과는 달리 그는 서울살이에 잘 적응했다. 아흔이 넘어서도 여전한 호기심으로 골목을 찾아냈고, 특유의 친화력으로 친구를 만들었다.
후배 페미니스트의 어머니, 이정자 선생님을 나는 두 번 만났다. 평생 그랬듯이 그는 내게도 직접 담근 장맛을 살린 밥상을 차려주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순이 넘으신 어른에게 이런 말을 써도 된다면, 나는 그의 '초롱초롱'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을 꼭 강조하고 싶다. 묻고 답함에 있어 지켜야 할 선을 잘 아는 현명함도 힘주어 말하고 싶다. 이 현명함의 인도 덕분에 그의 호기심은 품위 있게 순진하다. 나는 얼마 전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늙음'이 아니라 '늙어감'이고, '사랑하는'이 아니라 '사랑하게 된'이라고 말함으로써, 생의 하루하루는 단순 반복인 것 같아도 매번 절실하게 겪고 또 곰곰이 이해해 나가는 과정이 아니겠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늙어감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는 늙어감을 사랑하게 만드는 사람과의 만남이 중요하다. 자기만의 목소리, 자기만의 얼굴표정, 자기만의 웃음, 자기만의 자긍심을 지닌 94세의 인생 선배는 그냥 '만나는' 게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 속에서 나는/우리는 삶 자체에 대한 순연한 긍정을 느낀다. 늙는 걸 위협하는 현실 속에서 두 눈 부릅뜨고 정치를 살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역사를 살아낸, 역사가 된 노년을 만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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