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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했던 모든 공주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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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1980년대 후반,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태어나 평생을 자란 내게도 ‘인어공주’는 찰랑이는 새빨간 머리카락에 흰 피부, 유리구슬 같은 파란색 눈을 가진 존재였다. 같은 해 개봉한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에리얼 때문이었다. 인어공주만이 아니다. 백설 공주는 까만 단발에 빨간 리본이, 또 신데렐라 하면 금발에 하늘색 드레스가 떠오르는 것도 모두 디즈니의 영향이다. 어린이의 눈에 한없이 반짝이던 디즈니의 공주들은 자연스레 아름다움의 ‘모범’으로 한편에 자리 잡았다.
올해 개봉한 인어공주 실사화 영화를 두고 제작 전부터 ‘내 에리얼이 아니다(NotMyAriel)’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지는 등 극심한 반발이 나온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인어공주를 연기할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가 역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금껏 보고 자란 인어공주의 이상향이 있기에 괴리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앞서 만들어진 실사화 드라마나 영화에도 캐스팅 논란은 늘 따라붙곤 했다.
다만 이런 불만이나 아쉬움이 배우를 향한 도를 넘은 악성 댓글이나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는 영화가 ‘처참하게’ 실패하길 바라는 반응까지 정당화하긴 어렵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극장에 걸리기 훨씬 전부터 국내 포털 사이트 등에서 영화 인어공주는 ‘글쎄요’라는 반응이 ‘보고 싶어요’를 압도했다. 배우의 피부색과 외모를 집중적으로 조롱하는 댓글은 유튜브를 넘어 당사자의 인스타그램에까지 한글로 달렸다.
개봉 이후로도 인어공주를 둘러싼 소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미국 CNN방송이 ‘영화 인어공주가 중국과 한국에서 일부 관람객의 인종차별적 반응으로 실패했다’는 기사를 내보내자 “저조한 성적을 아시아 탓으로 돌리려 한다”는 분노도 들끓었다.
직접 영화를 관람한 결과, 이에 대한 외면이 오롯이 인종차별 때문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도 다른 요소보다는 캐스팅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도드라지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달 18일에도 한 언론은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를 꿈꾸고 상상했던 팬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은 채 에리얼의 외형을 바꿔 버렸다”고 짚었다.
하지만 2023년의 인어공주를 만나는 팬들에겐 과거의 디즈니를 보고 자란 세대만 있는 게 아니다. 다른 피부색을 가졌더라도 "공주가 될 수 있다"고 여길 오늘날의 아이들을 새로운 팬층으로 끌기 위해 1989년의 하얀 피부 인어공주를 답습할 필요는 없다. 우리 세대는 하얀 인어공주를 보고 자랐지만, 다음 세대는 하얗지 않은 피부와 찰랑이지 않는 드레드록스를 추억으로 간직하며 이 역시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다. 그 가능성을 꼰대들이 추억 타령으로 질식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에리얼의 아버지 바다의 왕 트리스탄은 결국 다른 세계의 인간을 사랑하는 딸을 인정하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제 한 가지 문제만 남았어. 저 애가 무척 보고 싶을 테니, 어쩌나.” 깊은 아쉬움에도 그가 딸을 육지로 떠나보냈듯이, 이제 사랑했던 모든 디즈니의 공주들과 이별하려 한다. 이들이 무척 보고 싶겠지만, 이미 과거가 된 동심이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의 그것보다 소중할 리 없다. 더 넓고 다양한 미래를 보여주는 것. 그건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라 어른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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