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합의 분노, 공화 강경파
내년 예산에서 무리한 요구
미 정부 폐쇄 등 후폭풍 우려
우여곡절 끝에 미국 연방정부의 부채한도를 늘리는 법안이 통과했다. 공화당 매카시 하원의장과 민주당 바이든 대통령 사이의 긴 협상 끝에 나온 타협안이었다. 상하원 모두 초당파적으로 통과되었고, 적어도 내년 대선까지는 같은 이슈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잘 알려지고 있지 않지만 공화당 내부의 후폭풍이 거세다.
그 단초는 부채한도법안이 하원을 통과하면서 이미 보였다. 원칙적으로 하원에서는 법안을 본회의에 상정할 때 개별 법안 하나하나에 대해 어떠한 토론과 표결과정을 거쳐 처리할지를 따로 규칙(special rule이라고 부름)으로 정하고 이 특별규칙을 본회의에서 다수결로 먼저 통과시킨다. 역사적으로 이 특별규칙은 하원의장과 다수당 지도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정해져 왔기 때문에 항상 다수당 의원 모두의 찬성과 소수당 의원 모두의 반대로 통과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화당 내 극우분파 29명의 의원들이 특별규칙에 반대표를 던졌고, 그래서 민주당에서 52명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지며 도와줘야만 했다. 2002년 이후 처음으로 소수당 도움으로 특별규칙이 통과한 것이다.
정부지출에 대한 대규모 삭감을 주장해 왔던 공화당 강경파, 프리덤 코커스(Freedom Caucus)의 요구사항들이 최종 법안에서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바이든 행정부의 주요 정책들을 철회시키는 내용도 많이 빠졌다. 극우분파의 입장에서는 공화당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백기를 든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불만에 가득 찬 공화당 극우분파 의원들이 행동에 나섰다. 부채한도법안이 통과한 바로 다음 주 11명의 하원의원들이 본회의 보이콧을 시작했다. 6월 6일 상정하기로 했던 5개 법안을 위한 특별규칙에 이들이 반대표를 던지면서 법안 상정 자체가 무산된 것이다. 하원 본회의 모든 일정이 그다음 주까지 1주일가량 중단되었는데 이들 의원들이 매카시 하원의장과 긴 미팅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원상복귀되었다.
미팅에서 약속받은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알려졌다. 향후 법안 협상과정에서 당내 온건파뿐만 아니라 극우분파도 포함시킬 것과 향후 법안 통과과정에서 부채한도법안처럼 민주당 도움으로 특별규칙을 통과시키는 일은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닌 듯 보인다.
먼저 지난주 공화당 소속인 하원 세출위원장이 내년 정부지출 법안과 관련해서 중요한 메시지를 내놓았다. 국방지출을 포함한 재량지출(discretionary spending, 연금이나 이자와 같이 반드시 지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의회에서 통과시킨 정책을 시행하는 데 사용하는 정부지출)의 규모를 2022년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과 합의한 내용은 올해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이보다 더 나아간 셈이다. 또 정부지출 법안을 하나로 합쳐서 통과시키던 관행을 버리고 1996년 이후 처음으로 12개의 개별법안 형태로 통과시키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백악관과 한꺼번에 협상하지 않고 상임위별로 공화당이 단독 처리하겠다는 의미인데, 극우분파의 지속적인 요구사항이었다.
하지만 하원 공화당의 정부지출 법안은 상원도 통과해야만 한다. 민주당이 다수당인 상원은 당연히 기존의 합의사항을 넘어서는 내용에 대해 반대할 것이 분명하고,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에 극심한 정쟁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양당이 타협하지 않으면 연방정부가 문을 닫은 상황(government shutdown)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과거 경험을 비춰보면 이것은 공화당에게 매우 불리하다. 유권자들은 자신이 받을 혜택을 공화당이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 극단적으로 나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매카시 하원의장의 입장이 중간에 낀 채 난처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당장 하원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극우분파의 요구를 들어주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언제까지 이들에게 끌려다닐지 관심 있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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