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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언제나 나를 이긴다

입력
2023.06.16 22:00
23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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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농촌은 분주하다. 부뚜막 위에 앉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할 일이 쌓여 있다.

본업이 출판사 사장인 나의 6월도 그 못지않게 바쁘다. 6개월간 공들인 신간이 나오고, 가을이 오기 전에 책으로 완성해야 할 세 개의 원고도 내 손길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주말 이틀을 아무런 방해 없이 쓸 수만 있다면, 비설거지 앞둔 들판처럼 웅성대는 회사 일들을 얼마간 정돈할 수 있을 듯했다. 이번 주말에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겠다고 엄마에게 통보하려 전화를 걸었다.

올해로 여든아홉인 엄마와 수 싸움에서 나는 이겨본 기억이 거의 없다. 전화를 받자마자 엄마가 간절한 기도문을 읊어대듯 말을 시작했다. "그러잖아도 전화하려 했다. 이번 토요일이 함평 사는 외숙 팔순이라는 거, 너도 기억하지? 너야 뭐, 일찌감치 안 간다고 했으니 이번에 내려와서 아버지 좀 보살펴 드려야겠어. 막내네가 따로 숙소를 잡고는 1박 2일 여행 겸해서 다녀오자고 하잖니? 한데 아버지가 며칠 전부터 영 안 좋으시네." 노인네의 처량한 한숨까지 섞어가며 엄마는 점점 더 끈적하게 나를 옭아맸다. "엄마, 나도 지금 무지하게 바빠서…"란 말이 몇 번이나 나왔지만 신산하게 살아온 외숙의 인생 스토리와 바다 건너 미국에서 달려온다는 이종사촌들의 도타운 우애, 멀리 함평까지 장모님을 모시고 가겠노라 선뜻 나서며 가족여행단을 꾸려버린 막냇사위의 배포에 이르기까지, 30분 넘게 이어지는 엄마의 전방위 펀치에 내 말들은 속절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마침내 '알았으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대답이 내게서 나오기 무섭게 엄마의 목소리에 윤기가 좌르르 돌았다. "아버지 보살피는 거 말고 딱히 할 일은 없다만…" 내 밭의 완두콩은 수확 때를 놓쳐 껍질이 말라가는 중이라고 했다. 농익은 앵두와 산딸기는 이번에 따서 술과 청으로 담그지 않으면 그 예쁜 열매가 다 땅으로 쏟아질 터였다. 여덟 그루 나무에 달린 매실도 청매실과 황매실로 분류해 갈무리해야 하고, 밭 위에 나뒹굴 듯 몸체를 다 드러낸 양파도 비 내리기 전에 거둬들이는 게 안전하다고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쪽이든 저쪽이든 하나라도 말끔하게 처리하자 싶었다. 새벽같이 달려가 해 뜨기 전에 완두콩 줄기를 헤집으며 꼬투리를 죄다 따서 소쿠리에 담았다. 텃밭 가에서 자라는 앵두와 산딸기는 손만 대도 툭툭 떨어질 만큼 새빨갛게 익은 상태였다. 팔뚝 여기저기를 산딸기나무 잔가시가 스치고, 대나무 장대를 맞은 매실들이 땀으로 범벅된 내 몸을 사정없이 때리며 쏟아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몸살로 얼굴이 핼쑥해진 아버지가 시종 흐뭇한 미소로 나를 지켜보고 계셨던 거다.

일요일 저녁때 돌아온 엄마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깨끗하게 순 쳐진 오이와 토마토, 수박 같은 텃밭작물을 확인한 엄마가 창고로 갔다. 문을 열고 선반 위에 가지런히 정렬한 매실, 산딸기, 앵두, 보리수 청과 양파를 본 엄마가 웃음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내가 농장일로 너무 바쁘잖니. 저 열매들을 볼 때마다 마음만 어찌나 어수선했는지…" 그게 바로 출판 편집자인 내 마음이라고요. 엄마는 전남 영광에 들른 김에 사 왔다며 법성포 보리굴비 다섯 마리를 내 트렁크에 찔러주었고 상추와 풋고추, 토마토, 오이까지 야무지게 챙긴 나는 본업 현장으로 부리나케 복귀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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