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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얼굴을 한 전쟁의 기억에 가려진 한국군·미군 '위안부'

입력
2023.06.17 04:30
11면

<121> 여성의 얼굴을 한 한국전쟁과 한미동맹

국가보훈처가 제작한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 홍보물. 국가보훈처 제공

국가보훈처가 제작한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 홍보물. 국가보훈처 제공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맞춰 국가보훈처와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선정한 ‘6·25전쟁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 영상이 공개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백선엽 육군 대장 등 10대 영웅으로 선정된 이들은 모두 남성이다. 너무 당연한가? 지금에야 3군 사관학교 여생도 비율이 10%가 넘고, 여성 징병제 요구도 심심치 않게 제기되고 있지만 70여 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전쟁은 언제나 남성의 얼굴로 상상된다. 예컨대 이만희 감독의 1962년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감독, 2004), '고지전'(장훈 감독, 2011), '인천상륙작전'(이재한 감독, 2016)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에 대한 스크린의 상상력은 남성들의 얼굴, 육체, 관계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여성이 등장하는 한국전쟁 서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걸출한 소설가 박완서는 많은 작품들에서 한국전쟁의 폭력과 상흔을 자신의 신체에 가둔 채 살아가는 여성들을 그렸다. 그러나 이들은 전쟁의 당사자라기보다 전쟁 후에도 지속된 비극적 일상의 상징으로 읽혔다.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 '태극기휘날리며'(왼쪽)와 '고지전'의 장면. 쇼박스 제공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 '태극기휘날리며'(왼쪽)와 '고지전'의 장면. 쇼박스 제공


한국군이 운영한 ‘특별위안대’

그렇다면 한국전쟁 당시 전장에는 정말 남성들만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2002년 사회학자 김귀옥 한성대 교수는 '육·이오사변 후방전사(인사편)'이라는 책자를 발굴해 세상에 알렸다. 이 책자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 ‘특별위안대’를 운영했음을 버젓이 밝히고 있는 공식자료다. ‘특별위안대’라는 명칭은 대번에 일본군 ‘위안부’를 떠올리게 한다. 맞다. 바로 그 ‘위안’이다. 일제 말 총력전 시기, 제국 일본의 국가와 군이 조선 여성뿐 아니라 전 아시아에서 여성들을 동원해 집단 성폭력 시설로서 ‘위안소’를 운영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시기 일본군이나 관동군에서 ‘위안부’ 제도를 경험한 이들이 해방 후 한국군 장교가 되었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자연스럽게’ ‘특별위안대’를 운영한 것이다. 월남민들에 대해 연구했던 김귀옥은 이들에게서 한국군의 성폭력과 위안소 운영에 대한 구술을 듣고 자료를 찾아 나섰고, 1956년 육군본부가 편집·발행한 이 책자를 발견한 것이다.

이 책자가 학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금서로 분류해 아무도 볼 수 없게 했다. 그러나 한국군이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밝힌 자료는 많다. 한국전쟁 당시 참전한 몇몇 장군들의 회고록에서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는 여과 없이 드러난다. 한 회고록의 표현에 따르면, 여성들은 ‘제5종 군 보급품’이었다(김희오, '인간의 향기: 자유민주/대공투쟁과 함께한 인생역정'). 여성들은 전장에서 싸우는 남성 군인들을 위해 존재한, 인간 아닌 ‘보급품’ 즉 사물이었다. 사물에는 얼굴이 없다. 얼굴이란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 양상이다. 한국군 ‘위안부’가 한국전쟁의 얼굴로 등장하지 않는 이유다.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과 교수가 쓴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의 표지. 도서출판선인 제공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과 교수가 쓴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의 표지. 도서출판선인 제공

그렇다면 한국군 ‘위안부’였던 이들은 누구인가? 김귀옥은 2019년 출판한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에서 한국군 ‘위안부’를 찾아 나선 지난한 여정을 들려준다. 한국전쟁 당시 북파공작원이 된 월남민들이 납치해 한국군에 상납한 여성들, 피란길에 한국군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끌려다닌 여성들... 그러나 피해자들은 그 누구도 얼굴을 드러내고 증언하지 못했다. 우리가 ‘위안소’를 운영했노라고, 군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고 ‘당당히’ 회고록을 남긴 장군들은 많은데 당한 여성들은 누가 알세라 숨죽이며 살아온 세월. 일본군 ‘위안부’가 얼굴을 드러내고 증언하기까지 반세기가 걸렸다. 한국군 ‘위안부’는 언제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을까. 우리가 그녀들의 폭력 경험과 고통을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할 때에야 비로소 그녀들이 이미 침묵으로 말한 사연들이 분명한 형태로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한미동맹의 당사자들, 미군 ‘위안부’

총성이 멈춘 후에도 이 땅에서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1954년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이후 본격화된 한미동맹 하에서 미군을 상대해야 했던 여성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흔히 ‘기지촌 여성’이나 ‘양공주’로 알려진 이들이다. 흥미롭게도 195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언론과 지역 사회에서 이들을 부른 명칭은 ‘위안부’였다. 그때까지 일본군 ‘위안부’는 ‘정신대’라는 호칭으로 불렸고 ‘위안부’는 오히려 미군 상대 성매매 여성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녀들은 당시 한국을 지켜주기 위해 이역만리 먼 땅에 와서 고생하고 있는 미군들이 이 땅에서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으며 있을 수 있도록 하는 ‘애국자’로 추켜세워졌다.

미군 기지와 가까운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양공주’ 언니들이 일하는 업소 운영자를 아버지로 둔 친구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무시무시한(?) 가사의 노래 ‘전우여 잘 자라’에 맞춰 고무줄놀이를 하곤 했다. 친구네 집이자 업소였던 기와집의 앞마당에서 한참 고무줄놀이를 하다가 지쳐 쳐다보곤 했던 언니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화투를 치다가 화장과 단장을 하고 미군과 함께 나가는 뒷모습들. 화려하면서도 어쩐지 처연했다. 그 처연함의 정체를 분명하게 깨달은 것은 20여 년이 지나 그녀들의 증언 그리고 여러 운동가 및 학자들이 규명한 미군 ‘위안부’의 실체를 공부하고 나서였다.

미군 ‘위안부’는 그저 생겨난 존재가 아니었다. 이들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보건부 법령에서부터 등장한다. 1961년 정부는 ‘윤락행위 등 방지법’을 제정하여 성매매 행위와 알선을 금지했지만 이듬해 미군 기지촌을 성매매를 허가하는 특별구역으로 지정했다. 1964년까지 성매매가 허가된 미군 기지촌은 145개로 증가했다. 기지촌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시청 직원과 보건소 직원들이 나와 업주들 그리고 여성들과 회의를 했다. 그 자리에서 여성들은 공무원들이 달러를 벌어들이는 자신들을 나라 살리는 ‘애국자’라고 칭송하는 소리를 듣곤 했다. 1969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닉슨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의 일부 철수를 의미하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 후에는 미군 철수를 무효화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정부 주도의 ‘기지촌 정화운동’이 벌어졌다. 말이 좋아 정화운동이었지 실상은 여성들에 대한 강제적 성병 검진을 일상화하는 등 그녀들의 몸과 성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 것이었다.

경기 동두천시 소요산 관광지 내에 있는 옛 성병관리소 건물. 성병 검진을 이유로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이 갇힌 모습이 동물원 속 원숭이 같다고 해서 미군들 사이에선 '몽키하우스'로도 불렸다. 동두천시 제공

경기 동두천시 소요산 관광지 내에 있는 옛 성병관리소 건물. 성병 검진을 이유로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이 갇힌 모습이 동물원 속 원숭이 같다고 해서 미군들 사이에선 '몽키하우스'로도 불렸다. 동두천시 제공

2014년 6월 25일 전직 미군 '위안부' 122명이 제기한 국가배상소송 자료를 보면, 이들이 기지촌으로 유입된 과정은 대부분 인신매매를 통해서였다. 사기나 구인광고로 유인한 후 인신매매된 경우가 가장 많았지만 인신매매범의 납치나 유인에 의한 경우도 상당했다. 이는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여성들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으며, 여성들을 속이거나 유괴하거나 끌고 가서 그 모자란 숫자를 채웠음을 의미한다. 기지촌에 ‘자발적으로’ 온 여성들 또한 가난이라는 사회적 조건이 자발을 강제한 경우였다.

2022년 9월 29일 한국 대법원은 “국가의 기지촌 운영, 관리 과정에서 기지촌 위안부였던 원고들을 상대로 성매매 정당화, 조장 행위와 위법한 강제 격리 수용 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하고 원고들 전원에게 위자료 지급을 명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미군 ‘위안부’가, 한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관리한 한미동맹의 당사자임을 확정한 순간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여자들의 전쟁 이야기는 남자들의 전쟁 이야기와 다르다고 단언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로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고통스러워한다. 이들은 말도 없이 더 큰 고통을 겪는다"고 그녀는 썼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의 한가운데를 지나며, 여성의 얼굴을 한 한국전쟁과 한미동맹을 생각한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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