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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테크닉은 수단일 뿐… 리스트에 대한 오해 지워낸 알프레드 브렌델과 임윤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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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인터뷰에 좀처럼 응하지 않기로 유명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국 문학잡지 '파리 리뷰'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세상 모든 것에 가능성을 활짝 열어두고 싶어 집단이나 학파, 분파를 좋아하지 않고 결론 내리는 것과 언제나 거리를 둔다. 서평이나 비평에 관여하지 않고 그 대신 번역을 좋아한다. 번역은 누군가를 판단하도록 요청받지 않고 그저 좋아하는 작품이 내 몸과 마음을 통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결론짓는 일을 습관처럼 하다 보면 자기 생각과 판단 안에 빨리 갇혀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가짜 세계에서 찾는 실제'라는 주제의 이 대화는 음악을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음악에 대한 감상 역시 무언가를 단언할 때 다른 가능성을 닫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역시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요즘 저는 개성 찾는 일은 접었어요. 작품에 대해 저 나름의 생각을 표현하려는데 그런 연주를 혼란스러워하는 관객과 관계자들을 봤어요. 더 난감한 것은 남들과 다르게 치고 이상하게 혹은 특이하게 치는 걸 개성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개성은 자연스러움 속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작곡가들의 작품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찾는 과정을 볼 수 있죠. 누군가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있어 모차르트 작품에서 슈베르트 교향곡이 들릴 수 있는 거죠. 저는 선 긋고 뭔가 정해놓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소설가나 연주자, 창작자나 해석자는 새로움과 익숙함 사이를 오가야 하는 동시에 낯설거나 뻔한 느낌과도 싸워야 한다. 이 과정을 겪는 동안 관객과 평단은 어느새 승자와 패자를 나누고 당사자와 상관없는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 판단은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어서 누군가는 폄하되고 누군가는 과한 칭송을 받는다. 시간이 지나면 이 평가는 완전히 뒤집히기도 하는데 연주자는 사후 10년만 지나도 바뀌지만 작곡가에 대한 평가는 훨씬 더 오래 걸린다.
지금도 억울한 평가를 받는 대표적인 작곡가 중에 프란츠 리스트가 있다. 오죽하면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은 그의 저서 '뮤직, 센스와 난센스'에서 "내가 리스트의 대변인처럼 구는 것은 스스로의 평판에 손해 되는 일임을 알고 있다"고 운을 띄우면서 '오해된 리스트'에 대해 수십 페이지에 걸쳐 글을 썼을까. 청중은 리스트를 찬양하는 피아니스트를 진지한 고전주의 해석자로 여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연주 프로그램에 베토벤과 리스트가 같이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짜증을 낸다는 것이다. 마치 냉전시대의 공산주의자나 이교도를 대하듯 '싫어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보전받는' 태도를 갖는다는 이야기다. 리스트가 만들어낸 혁명에 가까운 굵직한 활동은 음악사의 발전과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기에 오히려 음악가와 애호가들은 리스트에게 빚진 것이 더 많을 텐데 이렇게까지 불편해하는 이유는 뭘까.
브렌델은 하이든에서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베베른, 쇤베르크까지 이어지는 빈 악파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이자 대단히 논리적인 이론가다. 그는 리스트 음악 해석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는데 음악가와 애호가들의 존경을 받는 브렌델이 리스트에 대해 남긴 한마디는 따끔하고 묵직하다. "리스트를 잘 연주하려면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리스트의 뛰어난 테크닉은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주는 수단이었다. 그의 작품 중 신체적 기술이 주된 목적인 작품이 단 하나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작곡가의 작품에서 손을 떼는 편이 좋다."
리스트 음악에 대한 오해는 연주 과정에서 뛰어난 테크닉과 음악이 분리돼 생긴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피아노가 또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될 수 있도록 악기를 완전히 장악하고 표현해야 하는데 연주자에 따라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속도와 힘, 과장된 루바토(자유로운 템포)와 테크닉을 완성하는 것의 목표가 돼 음악적 이야기와 긴밀한 호흡이 빠져버린 연주를 접해 불쾌하고 알맹이 없는 리스트를 경험했을 수도 있다. 연주자 탓을 할 수 없는 게 '세기의 피아니스트' 리스트 수준에 맞춰진 작품이니 제대로 소화하기 어려운 탓이다.
그렇다면 리스트에 대한 편견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알프레드 브렌델, 러셀 셔먼, '리스트 스페셜리스트'로 불렸던 라자르 베르만 등 뛰어난 리스트 음악 해석자들의 음반, 좋은 연주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젊은 날의 프레디 켐프도 좋다. 특히 '초절기교 연습곡' 앨범은 과장은 빠지고 연주는 탄탄하며 리스트만의 매력이 살아 있다.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같은 곡을 연주한 임윤찬의 실황 앨범도 곧 만날 수 있다. 임윤찬의 리스트 해석은 이후 또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팬들에게 리스트 음악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편견을 깨뜨린 중요한 기록으로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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