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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와 새살, 다치고 채우는 삶

입력
2023.06.08 22:00
35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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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가져 본 가장 큰 흉터는 오른쪽 무릎부터 정강이에 걸친 것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다가 넘어지면서 한 뼘 정도의 찰과상을 입었다. 다치자마자는 아스팔트의 때가 묻은 줄 알고 다리를 물로 벅벅 닦았는데, 놀랍게도 거무튀튀해진 피부는 모두 상처였다. 울먹이며 동네 약국에 가서 약을 조금 사서 혼자 치료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병원 한 번 안 갔을까 싶을 정도의 깊고 오래가는 상처였다. 결국 흉터가 크게 남아 10대 시절 내내 반바지를 거의 입지 않았다.

몸 곳곳에 남은 흉터들을 본다. 넘어지거나 무거운 물건에 찧었거나 긁히거나 부딪힌 순간들. 다친 후에는 늘 '조심해서 걸을걸', '무리하지 말걸', '앞을 잘 보고 다닐걸' 하며 후회가 뒤따랐다. 후회는 곧 반성이 되어 얼마간 일상의 교훈이 되기도 했지만 상처를 완벽히 예방하지는 못했고 상처 입는 일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종종 일어났다.

어느 날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뒤늦게 손등 위에 가늘게 종이에 베인 상처를 발견한 적이 있다. 고통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얕은 상처라 별 조치 없이 며칠을 그냥 두었다. 무심함 때문이었을까, 결국 누가 보면 퍽 깊은 상처였던 걸로 보일 만큼 짙은 흉터가 남았다. 워낙 잘 보이는 곳이라 주변 사람들이 어쩌다 다쳤냐고 심심찮게 물어왔고 그럴 때마다 멋쩍게 별거 아니었다고 설명하고는 했다. 그렇게 짙은 흔적이 될 줄 알았다면 가만히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쉽게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쩐지 반감이 든다. 시간이 흘러 상처는 아물더라도 흉터가 보란 듯이 짙게 남아버리는 것처럼, 시간만 흘러가게 둔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상처 입는 일이 의지 밖의 일이라면 상처를 대하는 최선의 태도는 '다치지 않게 조심하기'보다는 '상처 이후 잘 회복하기'에 집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잘 낫고 있는지 자주 들여다보고, 감염이 없도록 소독하고, 부지런히 연고를 바르고 새 살을 기다리는 일.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후회하는 대신 우리는 스스로 치유하길 선택할 수 있다.

최근에 인상 깊게 본 영상이 있다. 한 사람이 깨끗한 물이 담긴 유리컵에 흙 같은 불순물을 넣고 휘휘 젓고선 물을 다시 깨끗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일지 묻는다. 먼저 불순물을 티스푼으로 일일이 걷어내는데 별 소용없는 방법이다. 이어 그는 큰 물통을 집어 들더니 이렇게 말한다. "제대로 된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컵에 다른 깨끗한 물을 넘치도록 계속 붓는 거예요." 그러자 물은 금세 깨끗해진다. 삶에 일어난 나쁜 일에 집착하기보다 좋은 일을 새로 채우는 것이 삶을 더 낫게 만들 것이라는 비유다.

상처를 온전히 치료하는 법은 머리로는 알아도 막상 제대로 행하긴 쉽지 않다. 상처에 딱지가 앉고 간신히 다 나아갈 즈음엔 맹렬히 간지러워서 몇 번이고 딱지를 뜯어버리고, 또 후회하기도 할 것이다. 그 경험도 모두 헛되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다. 설령 잘 관리하지 못해 결국 흉터가 남더라도 나으려는 자신을 놓지 않았다면 적어도 다음에 더 나아질 수 있는 자신, 능동적으로 회복하는 자신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상처의 깊이를 알고, 그저 내버려 두지 않고, 간지러워도 뜯기를 참고 나으려 노력하는, 단단한 선택으로 삶을 채워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김예진 북다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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