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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습관으로 타인을 구원하는 인간… 여우의 눈으로 포착하다

입력
2023.06.10 06:00
15면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주인과 하인'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꺼내 보는 '다시 본다, 고전'이 두 번째 시즌을 엽니다.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 교수이기도 한 진은영 시인과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 온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글을 씁니다.


1983년 유럽의 문화, 사회, 사회과학에 대한 공헌을 평가해 매년 수여하는 상인 에라스무스상 시상식에 참석한 '고슴도치와 여우'의 저자 이사야 벌린(맨 오른쪽). 위키피디아 커먼스

1983년 유럽의 문화, 사회, 사회과학에 대한 공헌을 평가해 매년 수여하는 상인 에라스무스상 시상식에 참석한 '고슴도치와 여우'의 저자 이사야 벌린(맨 오른쪽). 위키피디아 커먼스

이사야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는 제목 덕분에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책이다. 이 제목은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는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여우는 영리한 짐승이지만 고슴도치는 가시 바늘을 세우는 것 말고는 특별히 재주를 부릴 줄 모른다. 그러나 여우가 온갖 꾀를 내어도 고슴도치의 확실한 호신법 하나를 당해낼 수 없다.

고대 시인의 이런 생각은 현대의 자기계발서 저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당신이 매번 머리를 굴리는 여우형인지 확실한 성공과 자기방어의 ‘한 방’을 지닌 고슴도치형인지 생각해보고 고슴도치가 되도록 애쓰라고 조언하곤 한다. 호소력 있는 조언이다. ‘그래, 인생은 한 방이지!’ 그러나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대체 그 한 방은 어디에 있는가···.’

'고슴도치와 여우'는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에 대한 비평서이다. 벌린에 따르면 고슴도치형 인간은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원리와 연관 짓는다. 즉 모든 일을 관통하는 명료하고 일관된 원리가 있으니 이 자잘한 일들을 결정하는 하나의 큰 것을 찾아내야 한다고 믿는다. 반대로 여우형 인간은 다양한 목표를 추구한다. 그 목표들은 특별히 관계가 없고 때때로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이런 성향을 가지면 삶에서 실제 벌어지는 다채로운 일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뿐, 그것들을 꿰뚫는 유일한 진리에 도달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대체로 사상가들은 고슴도치형, 작가들은 여우형일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가령 도스토옙스키는 작가지만 고슴도치형에 속한다. 그렇다면 톨스토이는?

고전 '주인과 하인'을 쓴 러시아 문학의 거장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위키피디아 커먼스

고전 '주인과 하인'을 쓴 러시아 문학의 거장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위키피디아 커먼스

흥미롭게도 톨스토이는 고슴도치가 되길 열망하는 여우이다. 그는 보편적인 관념을 전하는 사상가가 되길 원했고 예술은 그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정작 작품 속에서는 자기의 믿음을 관철시키는 데 자주 실패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실패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들었다.

'주인과 하인'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부유한 러시아 상인이 하인과 겨울 숲을 헤매다 하인을 구하고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모든 사람이 형제라고 믿었던 톨스토이답게 이 소설에서 계급을 초월한 인류애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다. 첫 문단에서 주인공 브레후노프가 교회 장로라는 것을 읽는 순간 우리는 생각한다. 아, 그렇군. 연인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누군가를 위해서 죽으려면 확실히 종교적 심성의 주인공이 필요하겠지.

그러나 두 번째 문단부터 우리의 주인공이 얼마나 세속적인지 드러난다. 그는 젊은 지주에게 숲 하나를 사러 가는 길인데, 경쟁자들보다 먼저 가서 흥정을 하려는 욕심에 밤길을 나선 참이었다. 눈보라가 심하니 아침에 떠나라고 다들 말리지만 그는 기어이 하인 니키타를 데리고 무호르티(말)가 끄는 썰매에 올라탔다. 젊은 지주가 사는 마을까지 가려면 한밤의 숲을 통과해야 했다.

니키타는 부지런하고 친절하다. 그의 약점은 가끔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린다는 것. 브레후노프는 니키타의 약점을 빌미 삼아 품삯을 다른 일꾼의 절반만 준다. 제때에 주는 것도 아니고 매번 자기 가게에 있는 물건을 비싼 값으로 가져가게 한다. 장로이면서 사업장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사장님은 1870년대 러시아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인물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제 소설의 후반부 어디쯤에선가 탐욕스런 장로가 회심하는 장면이 등장할 것이다. ‘브레후노프’의 어원인 ‘브레훈’은 러시아어로 ‘거짓말쟁이’를 뜻한다니 분명 작가는 무늬만 종교인이던 한 인간이 고귀한 존재로 변하는 줄거리를 구상했을 것이다. 감동의 순간이여, 어서 오라.

설산. 게티이미지뱅크

설산. 게티이미지뱅크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숲에서 길을 잃는다. 브레후노프는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도 견딜 만큼 두꺼운 모피 외투를 두 벌이나 입었다. 그러나 얇은 외투 하나를 걸친 니키타는 꽁꽁 얼어가고 썰매를 끌던 불쌍한 짐승은 주저앉는다. 주인은 말을 풀어 혼자 도망치지만 숲을 뱅뱅 돌다가 결국 같은 자리로 되돌아온다. 그러고는 외투 앞자락을 열고 죽어가는 하인 위에 엎드려 그의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애쓴다. 아침에 사람들이 브레후노프를 발견했을 때, 그는 니키타를 꼭 껴안은 채 죽어 있었다. 밑에 있던 니키타는 동상에 걸리긴 했지만 살아났다.

왜 혼자 도망갔던 주인이 갑자기 숭고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인지 독자들은 알 수가 없다. 놀라운 결단의 순간은 어디에 있는가? 프랑스 작가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그런 건 없다고 말한다. 주인공의 행동은 미덕으로의 개종이나 선한 결단이 아니라 “단순하며 자연스런 몸짓”, 하나의 “불가피한 몸짓”일 뿐이라는 것이다. 블랑쇼는 주인공이 눈보라가 몰아치든 말든 일을 보러 나오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할 일을 찾는 걸 즐기는 상인이라는 점, 그리고 하인을 구하려는 순간 “우리는 이렇게 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좋은 조건으로 매매계약을 성사시키려 할 때처럼 민첩하게 군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단순하고 불가피한 몸짓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미국의 작가 조지 손더스. 위키피디아 커먼스

미국의 작가 조지 손더스. 위키피디아 커먼스

미국 작가 손더스는 브레후노프의 ‘단순한 몸짓’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겪은 일화를 소개한다. 한번은 그가 탄 비행기의 엔진이 고장나 15분간 추락의 공포를 겪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는 평소 이런 상황이 오면 자신은 지나온 삶에 대해 잠시 감사한 후 차분하게 일어나 다른 승객들을 쿰바야(영적 합일)의 분위기로 이끌 거라고 상상해왔다. 그러나 실제 상황이 닥치자 정신은 마비되고 오줌을 지릴 것 같은 공황에 빠졌다. 그때 옆 좌석에 있던 어린 소년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원래 이러기로 되어 있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의 심장이 그 아이에게로 나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심장이 ~에게로 나간다(one's heart goes out to)’는 표현은 누군가를 가엾게 여긴다는 뜻의 관용구이다. 손더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무언가 특별한 일처럼 들리지만 그게 우리 심장이 늘 하려고 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로 나가는 것.” 그건 가장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를 찾아오는 단순하고 불가피한 몸짓이다. 손더스는 정신을 차리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 맞아.”

끝까지 품위를 유지하는 어른으로 남겠다는 고상한 결단 뒤에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오랜 세월 부모 노릇, 가르치는 교사 노릇을 하며 누군가를 진정시키고 안심시키려고 했던 습관이 그렇게 시켰다. 아이는 의심하면서도 조금은 안심하는 얼굴이 되었다. 손더스는 자신의 에너지가 신경증적으로 안으로 향하는 게 아니라 아이를 향해, 내 바깥의 타자를 향해 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브레후노프도 늘 하던 대로 했을 거라고 말한다. 다만 “오랫동안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용되었던 타고난 에너지의 방향이 바뀐다.”

예일 영국 예술 센터가 소장 중인 새뮤얼 하윗 작가의 '여우와 고슴도치'. 위키피디아 커먼스

예일 영국 예술 센터가 소장 중인 새뮤얼 하윗 작가의 '여우와 고슴도치'. 위키피디아 커먼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의 첫 줄을 쓰면서 참된 삶이 갖춰야 할 숭고한 원리, 삶을 통째로 바꿀 결정적 한 방을 보여주리라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슴도치가 되려던 그의 열망은 실제 일어나는 일들을 포착하는 여우 같은 재능 때문에 좌절된다. 톨스토이는 종교적 대오각성이 있었다고 멋 부리는 대신, 흥정할 때마다 매물을 차지하려 허세를 부리던 이 상인이 이번엔 죽음의 사신에게 니키타를 절대 넘길 수 없다는 듯 군다고 쓴다. “이번엔 안 놓칠 거야.”

손더스가 강조하듯 니키타 곁에 돌아온 뒤에도 브레후노프는 대체로 그대로이다. 브레후노프는 여전히 강박적으로 자기만족에 집착하고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며 오만한 인간에 가깝다. 그렇지만 그의 체온으로 몸이 녹은 니키타가 작게 코까지 골며 자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각별한 기쁨”을 맛본다. 그리고 처음 만난 기쁨 속에서 달라지는 자신을 느낀다.

다른 존재들을 구하거나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창하게 새로운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 늘 하던 대로, 그러나 에너지의 방향을 조금 바꿔서, 매일매일 움직이면 될 뿐. 우리의 사랑이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듯 구원도 혁명도 그럴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고일 옮김·작가정신 발행·280쪽·1만2,000원

이반 일리치의 죽음·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고일 옮김·작가정신 발행·280쪽·1만2,000원


진은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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