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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젠더, SNS 등 신경쓸 게 천지... "그래서 연애는,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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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00만명에 달했던 한해 출생아가 2002년 40만명대로 내려앉은 지 20여년. 기성 세대 반도 미치지 못하는 2002년생 이후 세대들이 20대가 되면서 교육, 군대, 지방도시 등 사회 전반이 인구 부족 충격에 휘청거리고 있다. 한국일보는 3부 12회에 걸쳐 '절반세대'의 도래로 인한 시스템 붕괴와 대응 방안을 조명한다.
나를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장 커요. 몸도 망가지고, 쌓아 올린 커리어가 결혼과 출산으로 한순간에 저당 잡힐까봐 너무 무서운 거죠.
2002년생 대학생 이선주(가명·21)씨가 비혼·비출산을 선택한 이유
꽃다운 청춘은 불안을 넘어 공포에 떨고 있었다. 결혼과 아이 이야기만 나오면 몸서리를 쳤다. 때 되면 연애하다, 결혼하고, 아이 낳아 키우는 인생. '자연스러워 보였던' 삶의 경로를 지금 청춘들은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어린 시절 현모양처를 꿈꿨다는 스물 한 살은 도대체 어떤 각성을 했기에 이토록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게 됐을까.
온 나라가 월드컵 4강 기적에 취해 떠들썩했던 그 해, 전국의 산부인과에선 아기 울음소리가 잦아들며 출생아 수가 처음으로 50만 명 아래로 떨어졌다.(49만 6,911명). 대학생 이선주(가명·21)씨는 바로 그 2002년에 태어난 절반세대다.
아버지는 경남 양산시에서 성실한 근로자로 생계를 온전히 책임졌고, 어머니는 직장을 다니다 전업주부로 주저앉아 두 딸(1996·2002년생)을 키우며 살림을 도맡았다. 95만 명 또래와 함께 태어난 1972년생 동갑내기 부부가 스물 넷부터 일군 가정은 단단히 뿌리를 내렸고, 선주씨도 부모님의 단란한 삶을 한때는 본받고 싶었단다. "결혼과 출산의 이면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부모님이 얼마나 큰 희생과 헌신으로 자신의 삶을 갈아 넣고 있었는지를 철이 들면서 깨달았죠. 존경스럽긴 하지만, 제가 이번 생에 감당할 수 있는 몫은 아닌 것 같아요." 부모님 세대처럼 살고 싶진 않다고 결심한 이유다.
괜찮은 '인서울' 대학을 다니며 착실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연애도 척척 문제 없이 해온 선주씨. 이런 청춘이 왜 결혼을 거부했을까 싶겠지만, 선주씨가 생각하는 사랑은 딱 연애까지만이다. 그에게 결혼은 "단점만으로 가득한, 외면하고픈 선택지"다. 둘만 좋으면 그만인 연애와 달리, 결혼은 함께 딸려오는 가족까지 챙겨야 한다는 게 무엇보다 큰 부담이라고 한다.
선주씨 걱정처럼, 이 땅에서 결혼은 여전히 부모님이 '혼주'로서 청첩장을 보내 손님을 초대하는 '집안끼리의 결합'으로 간주된다. 내 부모 모시기도 버거운데, 배우자 부모까지 챙겨야 하고, 결혼이 아니라면 평생 '남'이었을 사람들의 참견과 훈수를 버텨야 한다. 선주씨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고 말했다.
출산은 여기서 한 발 더나아가는 두려움이다. 자식들을 돌보기 위해 일을 그만둔 어머니의 경력 단절을 보면서 '아이 낳고 키우면 여자 커리어는 끝장'이란 걸 뼛속 깊이 체감했다. 육아는 더 큰 걱정으로 다가온다. "부모의 무한 책임을 강조하는 육아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과연 잘 키울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성숙한 어른인가'를 돌아보게 돼요. 무한 경쟁사회에 태어난 아이가 행복할지도 의문이고, 나중에 '왜 낳았느냐'고 원망하면 정말 못 견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말들을 종합해 보면, 스물 한 살 이선주에게 비혼과 비출산은 스스로를 굳게 지켜내기 위한 '합리적 선택'의 결과다. 6살 터울 언니는 일찌감치 비혼·비출산을 선언했고, 어머니도 "하고 싶은 대로 살라"며 응원했다고 한다.
나이 들어 혼자 외로워지는 데 대한 두려움은 없을까. "굳이 결혼 아니어도 마음 맞는 동반자가 있다면, 평생 연애하고 동거하며 살면서 '온전한 내 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동물을 좋아하는 선주씨는 노년엔 공무원 연금을 받으며, 유기동물센터에서 봉사하며 살고 싶다고 한다.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결혼과 출산 '보이콧'에 나선 선주씨가 유별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일까.
한국일보가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 절반세대 전후 청년 20명(1998~2004년생 대학생·직장인 남녀 각 10명)은 저마다 이유는 달랐지만, 결혼·출산의 가치를 낮게 봤고, 연애마저 심드렁하게 여겼다.
심리적 안정, 자녀가 주는 행복, 외롭지 않은 노후 등 결혼·출산의 이득도 분명히 있지만, 그 이익의 단계에 갈 때까지 감당해야 하는 비용과 손해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절반세대가 뽑아낸 연애·결혼·출산의 마이너스 항목은 이랬다.
①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 배우자와 자녀를 온전히 책임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
②내 커리어와 돈, 시간은 뻔히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박탈감.
③완벽한 조건에서 시작하지 못할 바에야, 처음부터 포기하고 말겠다는 중압감.
과거 부모세대의 연애·결혼·출산은 각각의 결과가 자연스럽게 맞물려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 청춘들에게 연애, 결혼, 출산은 각각이 '힘겹게 넘어야 할 높은 장애물'과도 같다. 그들이 세상에 보내는 '연애·결혼·출산 파업 전상서'에 가득찬 절규들을 더 살펴봤다.
주변에서 하도 '환승연애'(연애리얼리티 프로그램)가 재미있다고 해서 봤는데, 첫만남의 정적부터 숨이 막혀 꺼버렸어요. 감정 소모를 지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시간이 아깝더라고요.
'연애 무용론자' 2000년생 직장인 김나현(가명·23)씨
고교 졸업 후 바로 공공기관에 취업한 뒤 현재는 직장과 학업을 병행 중인 김나현(가명·23)씨. 나현씨에게 연애는 '쓸모없음' 그 자체다. 24시간을 분단위로 쪼개 쓰며 '현생'을 감당하느라 연애에 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그에게 지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중에 혼자 살아도 당당할 수 있는 삶의 기반'을 다지는 일이다.
"제 명의의 집과 차를 사야 하고, 공부·운동·여행을 게을리할 수 없으니, 여기에 연애가 끼어들 틈이 없는 거죠." 이런 나현씨가 '남의 연애'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는 이유다.
청춘이 연애에 목말라 할 거라는 건 순전히 기성세대만의 착각이라고 '요즘 애들'은 말한다. 타인과의 감정 교류에 한가하게 힘을 쏟기보다, 당장 내 삶에 투자하는 일에 열성을 다하는 게 '요즘 애들의 연애'다.
취업이 급한 데 썸을 타고 밀당을 즐길 여유가 없다는 대학생 이민준(가명·25)씨. 그에게 연애는 "물질적, 정서적, 시간적 여유를 갖춰야 누릴 수 있는 사치재"다.
성평등 인식이 높아지고 소비 수준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현상도, 절반세대를 '절식남녀'(연애에 적극적이지 않은 남녀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로 만들었다.
절대 안되죠!
2002년생 대학생 전세연(가명·21)씨
조건을 따지지 않고 사랑만으로 연애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2002년생 대학생 전세연(가명·21)씨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연애는 배우자를 찾는 준비 단계'라 굳게 믿는 세연씨가 상대를 고를 때 삼는 최우선 기준은, 학벌도, 직업도, 집안도 아닌 젠더 감수성. "전에 사귀던 남자친구가 여성 정치인을 혐오하고 깎아내리는 걸 보고 정이 떨어졌어요. 그 길로 헤어졌죠."
세연씨가 유별나서가 아니다. 연애·결혼 상대를 선택할 때 젠더 감수성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요즘 연애'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젠더 갈등 및 데이트 폭력에 대한 우려로, 이성과의 만남 자체를 주저하고, 꺼려하는 분위기는 남녀 가릴 것 없이 적지 않게 퍼져 있다.
여학생들의 말을 들어보자. "에타(대학교 익명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의 줄임말)에서 젠더 감수성 떨어지는 막말하는 사람들 보면, 미래에 저런 사람을 만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죠."(이선주씨) "데이트 폭력 등 흉흉한 사건을 접할 때마다 사람 만나기가 더 두려워지는 거 같아요."(김나현씨)
남학생들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다. "젠더 이슈에 대한 스펙트럼이 워낙 다양해, 이성을 만날 때 말과 행동을 더 조심하게 되죠."(이민준씨), "막상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정치권에서 젠더 갈등을 실제보다 과장해 부추기고 있어 이성친구들과 대화에 어려움을 겪습니다."(대학생 송우현(가명·20)씨)
'보여지는 연애'에 대한 부담도 크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일상을 공개하는 게 익숙한 절반세대에게, 연애는 사회·경제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컸던 절반세대는 소비의 씀씀이도, 눈높이도 남다르다. 점심 한끼에 20만원이 넘는 오마카세를 즐기거나, 기념일 때마다 호캉스(호텔에서 즐기는 휴가)를 떠나는 게 특별하지 않다는 게 절반세대가 전한 요즘 데이트 풍속도다. 그러나 물질에 집착할수록, 비교에서 오는 피로감이 쌓인다. 연애는 그래서 버거워진다.
여자친구 생일을 기념해 선물과 데이트 비용을 대느라, 한달 용돈 50만원을 하루만에 탕진했다는 대학생 성도율(가명·22)씨. 그는 "인스타에 다른 커플들이 올리는 데이트 코스를 보면 비교가 되고,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다"며 "나도 잘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압박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완벽한 연애'에 대한 강박이 커지면서, 요즘 청춘들의 연애에선 △너무 무겁거나 △너무 가볍게 생각하려는 양극화 현상이 감지된다.
대학 입학 후 주변의 소개팅 제안을 한사코 쳐내는 '철벽남' 송우현씨는 "할거면 제대로 하고, 아니면 시작을 안 하는 게 낫다"고 말한다. 반대로 이민준씨는 데이팅 어플 등을 통해 '자만추'로 이성을 만나는 편이라고 당당히 털어놓는다. 여기서 자만추는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가 아닌 '자고 나서 만남 추구'라는 뜻.
"안 그래도 각자 사는 게 힘든 데, 서로를 일일이 간섭하는 건 너무 부담스럽지 않나요? 연애와 비슷한 감정과 욕구를 적당히 즐기다 헤어지는게 훨씬 맘 편하죠." '자만추'를 선택한 민준씨는 만족한다고 했다.
연애부터 이토록 진입장벽이 높아졌으니, 결혼에 이르는 길은 오죽할까. 절반세대가 결혼을 한사코 거부하는 이유를 이어서 들어봤다.
※절반세대의 결혼관에 대한 기사 '단칸방 사랑에 코웃음친 절반세대... 결혼은 자격증 필요한 특권'으로 이어집니다. 제목이 클릭되지 않을 경우 아래 주소를 입력하시면 기사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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