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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에 국경이 있나요?"···N차 관람에 일본어 가사 번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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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문화 교류의 새 장이 열리고 있다. '역사는 역사, 문화는 문화'로 분별하며 국경을 넘나드는 '보더리스 세대'가 주역이다. 당당하게 서로의 문화를 향유하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양국의 문화 교류 현상을 짚는다.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일본인인데 굿즈를 사고 싶다면 직구(해외 직접 구매)해야죠. 음원 사이트에 음악이 없다면 CD에서 추출해내야 하고요.
일본 문화를 즐기는 우리나라 Z세대(1996~2010년생)의 방식은 상상 이상으로 적극적이다. 오프라인 행사가 일상인 국내 아티스트와 달리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물을 파는’ 과정에서 팬들끼리 일본어 번역과 음원 추출을 돕는 등 우리나라 팬들만의 새로운 품앗이 문화도 생겨났다.
J팝 열풍의 주역으로는 단연 ‘나이트 댄서’로 틱톡을 점령한 일본 싱어송라이터 이마세가 꼽힌다. 최근에는 일본 대형 연예기획사 쟈니스에 소속된 아이돌이 큰 인기다. 고등학생인 박현정(18)양은 쟈니스 소속 그룹인 리토루 칸사이를 좋아한다. 그러나 리토루 칸사이의 음악은 CD 등 실물 판매만을 고수하는 쟈니스의 방침으로 인해 멜론·지니 등 국내 주요 음원 사이트에선 들을 수 없다. 박양은 “CD를 구매해 음원을 직접 리핑(디지털 콘텐츠에서 음악 등 일부를 추출하는 작업)한 다음 휴대폰으로 옮겨 듣거나 사운드 클라우드(온라인 음악 유통 플랫폼)에 다른 팬들이 음원을 업로드해준 것을 스트리밍(재생)한다”고 설명했다.
일본어 콘텐츠를 수월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서로 번역 품앗이까지 한다. 일본 인기 아이돌 그룹 나니와단시를 좋아한다는 문예담(16)양은 “외국어 콘텐츠라 관련 영상·노래 내용을 이해하는 게 어려울 수 있다”며 “가사 해석본을 쓰거나 영상에 한국어 자막을 달아 다른 팬들이 볼 수 있도록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하는 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굿즈’ 해외 직구도 함께한다. 박양은 “해외 배송비가 만만치 않아 함께 굿즈를 배송받을 팬들 수요를 조사하고 공동 구매를 한다”며 "일본 굿즈가 유통되는 플랫폼인 메루카리는 물론 쟈니스 공식 굿즈숍을 통해 두어 달에 한 번씩은 일본 직구에 나선다"고 말했다.
일본 영화 또한 젊은 세대가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대표적 장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 3월 내놓은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일본 영화 관객 점유율은 28.3%로 한국 영화 점유율(19.8%)보다 앞섰다. 물론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 점유율이 압도적이지만, 일본 청춘 로맨스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몫도 적지 않다. 이 영화는 나니와단시의 멤버 미치에다 슌스케가 주연을 맡아 입소문이 났는데 2월 독립·예술 영화 흥행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 영화 관객의 주 연령대는 1020세대로 전체의 64%에 달한다. 미치에다 슌스케를 좋아하는 Z세대 팬층의 기여가 실제로 컸다는 뜻이다. 이들은 특히 ‘N차 관람’(2회 이상 다수 관람)에 거리낌이 없다. 김서연(18)양은 원작인 일본 소설을 먼저 접한 사례. 김양은 "영화 제작 소식을 듣고 개봉을 기다려 영화를 첫 관람했다"며 "이후 미치에다 슌스케가 내한해 무대 인사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왕복 7시간 거리인 전북 군산에서 상경해 두 번째로 관람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미치에다 슌스케를 좋아한다는 문양 역시 “영화를 극장에서만 여섯 번 봤고 지금은 영화를 온라인으로 구매해 소장 중”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젊은 세대 역시 한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즐긴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화장·패션 스타일 전반을 뜻하는 ‘한국풍(風)’이 최신 트렌드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일 도쿄의 신오쿠보 거리에 나온 압도적 다수는 젊은 일본인 여성이었다. 친구와 함께 왔다는 한 20대 여성은 “신오쿠보에 한두 달에 한 번은 온다”며 “한국 화장품의 아이섀도나 립 제품이 반짝반짝해서 좋다”고 평했다. 같은 날 도쿄의 하라주쿠에도 많은 일본인 손님이 몰렸다. 한국 패션을 상징하는 브랜드 ‘스타일난다’가 하라주쿠를 대표하는 다케시타 거리 한가운데 당당히 입점해 있었다. 큰 길가엔 ‘홍콩반점’이 있고 한국 음식 푸드코트도 생겼다. 떡볶이를 먹던 한 여성은 맵지 않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한국풍 붐은 더 이상 특정 지역에 국한돼 있지 않다. 한국 음식과 패션, 화장품은 이제 신오쿠보나 하라주쿠뿐 아니라 거리마다 있는 드럭 스토어와 편의점에까지 진출했다. 지난 3월 31일 편의점 로손이 발매한 한국 화장품 ‘롬앤’의 상품은 2개월 분으로 준비한 30만 개가 3일 만에 매진되기도 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시세이도’를 비롯한 일본 화장품 브랜드를 명품으로 인식했고 하라주쿠는 세계의 스트리트 패션을 이끄는 유행의 첨단이라 여겼던 한국의 4050세대에게 이런 풍경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이제 일본 젊은이들에게 유행의 첨단은 한국이다. 이들은 “역사·정치 문제와 문화는 별개”라며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이들은 한국 패션과 메이크업이 △일본 제품보다 훨씬 빠르게 유행을 반영,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고 △좋아하는 K팝 스타가 모델인 점 등을 매력으로 꼽았다.
문화 교류에 적극적인 한일 Z세대를 두고 ‘상대국에 대한 적개심이 줄어든 젊은이들'이라며 단순한 세대론으로 접근하기 쉽다. 그러나 이들의 문화 장벽이 이토록 낮아진 현상은 단지 한 세대 안에서 급격히 일어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성상민 대중문화평론가는 "일본은 좋든 싫든 꾸준히 상호 간에 문화적 영향을 받아온 나라"라며 "마니아층에 한정하더라도 일본 문화에 대한 수요층은 이전 세대 때부터 언제나 존재했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최근 일본 문화 열풍이 더 강력해진 건 왜일까. 성상민 평론가는 "자국 문화에 대한 피로도가 쌓여있던 차에 틱톡 등 숏폼 콘텐츠로 인한 문화 확산·접근이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가사 이해도가 낮아도 '밈'(meme·온라인에서 유행하는 콘텐츠)처럼 즐길 수 있는 짧은 호흡의 영상으로 국경에 상관없이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된 영향이 크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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