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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결정이 모인 곳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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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건 인문학적 교양입니다. '문송'의 세계에서 인문학의 보루로 남은 동네책방 주인들이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제주에 출장 겸 여행 갈 일이 생겼다. 사실상 다른 책방에 구경하러 가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다. 책방지기의 출장이라는 명목하에 여행 일정을 잡기 시작했다. 단연코 책방에 들르면 책을 한 권 사게 될 거라는 생각이었지만, 첫 번째 장소에 가기까지 여유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동안 읽을 책이 있을까 고민하던 중 집어 든 책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였다. 아마도 여행지에서의 나의 시간도 흐르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미련이 담겨있지 않았을까. 영원한 휴가라는 것은 있을 수 없지만 말이다. 진한 파랑에 금박으로 둘러싸인 작고 예쁜 표지와 다르게 내용은 딴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완전한 물리학, 최근 떠오르고 있는 이슈인 양자역학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책의 저자는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 양자역학 이론과 실험을 함께 연구하는 분으로 유사한 책을 몇 권이나 쓰셨다. 그가 쓴 책의 내용은 모두 비슷하지만, 전개하는 방식과 설득력에서 이 책이 가장 난감하다. 시작부터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바로 들이대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독자가 책을 펼쳤다가 30페이지도 넘기지 못한 채, 1장 2부 '방향성의 상실'에서 방향을 잃고 떠도는 영혼이 되어버린다.
시간은 상대적이기에 책을 읽는 시간의 절대성에 대해서 논할 이유는 없지만, 방향을 상실한다면 정말 방법이 없다. 물리학에서 시간과 공간의 왜곡은 동시에 일어남을 보여주기에 과학적으로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 인간은 둘 중 한 가지만 잃어도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제주의 어느 바닷가 바위 위에 앉아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때에는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어떤 때는 한없이 지루함의 연속이 계속된다고 느낀다.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는 평일은 느리게 가지만, 주말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군인들의 시계는 정말 더 느리게 흐르는 상황을 이 분야로 증명 가능하다.
책방지기로서 책이 가득한 이 공간에서는 어떨까. 때로는 지루함의 연속이 지속되고, 때로는 여러 이벤트로 인하여 입자 간의 상호작용이 무수히 일어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은 책방들은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창문 밖의 세상과 비교한다면 상대적으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이고, 이 개념을 적용하면 시간이 역행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 놓이는 책방은 창문 밖의 세상보다 과거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거꾸로 흘러가는 멈춰버린 향기에 이끌려 작은 입자들이 블랙홀에 뛰어드는 것처럼 사람들은 책방으로 들어온다.
양자역학의 모든 책이 그러하듯이, 이 책 역시 마지막에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현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미래를 헤엄치고 있으며, 또 다른 앞을 보고자 한다.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한 행동은 다른 입자들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책방 글쓰기 모임인 '수락'에서 낭독했더니, 한 분께서 그림으로 그려주셨다. 이 또한 하나의 입자가 다른 입자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우리는 항상 상호작용을 하면서 살아간다.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는 것은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책을 읽고 완전히 이해했다면 거짓이거나 과시일 수 있다. 왜냐하면 양자역학 자체가 아직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섣부르게 읽으려고 하지 말고, 찬찬히 생각을 해보며 음미해보는 것이 어떨까. 그래서 이 책을 추천할 때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과학적으로 읽지 말고 철학적으로 다가가며 읽으세요.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그냥 넘기며 읽으세요.' 그리고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요.'
양자역학과 함께 물리학의 스토리가 궁금하다면 '보이는 세상이 실재가 아니다'가 도움이 된다. 일전에 책방 스터디도 이 책으로 진행하였다. 양자역학이라는 과학자들도 이해 못 하는 분야가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있다. 책에는 어려운 용어나 공식을 쓰지 않고 담백하게 글을 쓴 저자의 역량은 대단하다. 더 간단하고 쉽게 읽고 싶다면, 저자의 다른 책인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또는 '모든 순간의 물리학'을 읽는 것이 좋다. 저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양자역학을 풀어내고 있다. 이는 여러 시각으로 풀어야 해결할 수 있는 양자역학의 숙제를 잘 나타낸다.
제주에서의 여행 일정은 엉망이 되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 휘둘리기 싫어서일까, 아니면 휴가로 온 출장을 끝내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바다 앞에서 읽은 과학책은 그저 물결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이것이 때로는 의미 없는 거품일지 몰라도. 이 시간만큼은 온전히 나의 시간을 가진 것은 아닐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과학은 과학적이지 않으며, 생각의 결정이 우리를 이끌어 나간다.
동주책방은 부산시 수영구 망미동에 있는 국내1호 자연과학책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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