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고비 넘기고 두 번째 삶" 엄정화·차정숙 닮은꼴의 기적

입력
2023.06.05 06:0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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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닥터 차정숙' 예능 '댄스가수 유랑단' 제2의 전성기
'전업주부 설움, 워킹맘 고군분투'에 응원... "나와 닮은 차정숙 더 뭉클"
올해 가수 활동 30년, 새 앨범 준비 "나이에 갇히지 않을 것, 차정숙처럼"

드라마와 무대에서 엄정화의 모습은 180도 다르다. '닥터 차정숙'에서 경력 단절 여성의 직장에서의 고군분투를 짠내 나게 그린 엄정화는 '댄스가수 유랑단'에서 관능적으로 노래한다. tJTBC, vN 제공

드라마와 무대에서 엄정화의 모습은 180도 다르다. '닥터 차정숙'에서 경력 단절 여성의 직장에서의 고군분투를 짠내 나게 그린 엄정화는 '댄스가수 유랑단'에서 관능적으로 노래한다. tJTBC, vN 제공

지난겨울, 순조롭게 이뤄지던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 촬영이 중단됐다. 서이랑 역을 맡은 이서연이 아버지 서인호(김병철)가 반대한 미대 진학을 준비하다 들켜 호되게 혼나는 장면에서 펑펑 울어야 하는데 눈물을 흘리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상황. 그때 극 중 이랑의 엄마 차정숙 역을 맡은 엄정화(54)는 딸에게 다가가 두 팔로 20여 초 동안 부둥켜안았다. 대본에도 없는 엄정화의 돌발 행동에 중견 배우 박준금은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나더라"고 말했다. "액션!" 엄정화에 안긴 뒤 다시 카메라 앞에 선 이서연의 눈에선 거짓말처럼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촬영이 몇 번 중단되니 눈치가 보여 서연이가 포기하려고 하더라고요. 어떤 마음으로 이 장면을 준비했고, 그 감정이 제대로 안 나오면 얼마나 괴로운지 전 아니까요. 가서 만져주면 도움이 될 거 같았어요." 지난 1일 서울 강남구 소재 사람엔터테인먼트에서 만난 엄정화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진짜 이랑 엄마 같았다.

드라마 '닥터 차정숙' 에서 차정숙을 연기한 엄정화는 좋아하는 대사로 "내가 행복해질 길은 스스로 찾아보겠다"를 꼽았다. JTBC 제공

드라마 '닥터 차정숙' 에서 차정숙을 연기한 엄정화는 좋아하는 대사로 "내가 행복해질 길은 스스로 찾아보겠다"를 꼽았다. JTBC 제공

차정숙은 의대생 시절인 젊은 나이에 임신해 두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로 살다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이젠 뻔뻔하게 살겠다"며 20년 만에 레지던트를 시작한다. 엄정화가 차정숙의 경력 단절의 설움과 '워킹맘'의 강인함을 실감 나게 보여주자 드라마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첫 회 4.9%로 출발했던 시청률은 4일 종방 직전 20% 문턱까지 치솟았다. "젊은 친구가 잘못하면 실수지만 나이 먹은 사람의 잘못은 무능"이란 쓴소리를 들으며 차정숙처럼 직장에서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게 현실. 절망을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서려는 차정숙에게 시청자들은 TV 앞에 몰려들어 그를 응원했다. 엄정화는 "어떤 주부가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있는데 다시 도전해 보겠다고 DM(다이렉트 메시지)을 보냈다"며 "드라마를 통한 작은 공감이 누군가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거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드라마 '닥터 차정숙'에서 차정숙처럼 엄정화도 살림꾼이다.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려서부터 제사상을 준비했다. "저 요리 잘해요, 하하하." 1일 만난 엄정화의 말이다. 사람엔터테인먼트 제공

드라마 '닥터 차정숙'에서 차정숙처럼 엄정화도 살림꾼이다.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려서부터 제사상을 준비했다. "저 요리 잘해요, 하하하." 1일 만난 엄정화의 말이다. 사람엔터테인먼트 제공

엄정화와 차정숙은 묘하게 닮았다. 엄정화는 2010년 갑상선암 수술을 받은 뒤 8개월 여 동안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원인은 왼쪽 성대 신경 일부 마비. 그는 "꿈을 좇아왔던 시간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숨소리를 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던 시절, 엄정화는 꾸준히 재활치료를 받고 목소리를 되찾기 시작했다. 드라마에서 차정숙도 간 이식 수술을 받은 뒤 꿈을 다시 좇는다. 엄정화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두 번째 삶을 시작한 차정숙과 제 인생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뭉클했고, 그런 일들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래서 더 '차정숙이 어떤 감정일까'에 몰입하며 촬영했다"고 말했다.

엄정화가 예능프로그램 '댄스가수 유랑단'에서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히트곡 '배반의 장미'를 부르고 있다. tvN 제공

엄정화가 예능프로그램 '댄스가수 유랑단'에서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히트곡 '배반의 장미'를 부르고 있다. tvN 제공

엄정화가 지난해 12월 '닥터 차정숙' 촬영을 끝낸 후 가장 자주 찾은 곳은 춤 연습실이다. 그는 tvN 예능프로그램 '댄스가수 유랑단'으로 요즘 전국 각지를 누비며 무대에 선다. 김완선, 이효리, 보아, 화사 등이 그의 유랑 동료다. 그에게 유랑단 활동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간"이다. 1993년 '눈동자'가 실린 1집을 낸 뒤 올해로 가수 활동 30년. 다시 일어선 엄정화는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가수로서 발라드부터 디스코, 힙합까지 아우른 엄정화는 스크린에서도 연쇄살인범(영화 '오로라 공주')과 탈북 요원('오케이 마담')으로 쉼 없이 변신했다. 배우와 가수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그의 신조는 "시도를 두려워하지 말자"이다.

"2016년 앨범 '드리머'를 냈을 때 (차트) 100위 안에서 노래를 찾아볼 수 없더라고요. 충격이 컸죠. 하지만, 노래도 연기도 내가 하기 편한 장르만 고집했다면 이렇게 오래 활동하지 못했을 거예요. 돌아보니 어느 하나 의미 없는 게 없어요. 그러니 시도하지 않을 이유도 없고요. 나이에 갇히지 않으려고요. 차정숙이 준 '시작하기 늦은 나이는 없다'는 메시지를 품고서요."

엄정화는 "김완선 이효리 보아 화사 등 '댄스가수 유랑단' 멤버들과 드라마 '닥터 차정숙' 첫 방송을 함께 봤다"며 웃었다. 중견 배우가 된 그는 드라마에 함께 출연한 동료들을 집에 초대해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사람엔터테인먼트 제공

엄정화는 "김완선 이효리 보아 화사 등 '댄스가수 유랑단' 멤버들과 드라마 '닥터 차정숙' 첫 방송을 함께 봤다"며 웃었다. 중견 배우가 된 그는 드라마에 함께 출연한 동료들을 집에 초대해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사람엔터테인먼트 제공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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