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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키신저는 누구였나?

입력
2023.06.05 00:00
26면

100세를 맞은 키신저, '리더십' 출간
한반도 위기 때 홀로 군사대응 주장
1960~70년대 제대로 평가해야

헨리 키신저. AFP 연합뉴스

헨리 키신저. AFP 연합뉴스

100세를 맞은 헨리 키신저가 작년에 펴낸 '리더십' 번역본이 나오자 그에 대한 찬사가 언론 지면을 장식했다. 키신저는 닉슨-포드 행정부 시절에 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격동기의 미국 외교를 이끌었다. 키신저는 닉슨의 중국 방문을 실현시켰고, 베트남 전쟁 종식을 위한 파리 협상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파리 평화협정은 남베트남을 포기한 것과 같아서 업적도 아니다. 4차 중동전쟁 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소련과 전략핵무기 감축협상을 이룩한 것이 그의 진정한 업적이라고 하겠다.

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키신저는 우리나라에 관한 중요한 결정에 참여했으나 그가 우리나라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했는지는 생각해 볼 점이 있다. 닉슨 대통령 임기 초인 1969년 4월 15일, 동해의 공해 상공에서 정찰 임무 중이던 미군 EC-121기(機)가 북한 미그기의 공격으로 격추되어 승무원 3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닉슨 대통령이 소집한 국가안보회의에서 윌리엄 로저스 국무장관과 멜빈 레어드 국방장관은 보복 공격은 전면전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 자제할 것을 주장했으나 키신저는 이런 도발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면서 군사적 대응을 주장했다. 닉슨도 처음에는 보복 공격을 생각했으나 위험성이 너무 크다는 CIA와 합참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항모 전단을 파견해서 경고하는 데 그쳐야 했다. 닉슨은 회고록에서 키신저가 군사 보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고 썼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지역에서 벌목 작업을 지휘하던 미군 장교 두 명이 북한군의 도끼에 맞아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백악관은 긴급하게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합동참모본부는 DMZ 부근 북한 지역에 포격을 하는 방안이 있으나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했다. EC-121 사건의 굴욕을 기억하는 키신저는 최소한 판문점 부근의 북한군 시설을 포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키신저의 주장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포드 대통령은 주한미군사령관이 제안한 대로 벌목 작업을 강행하는데 그쳤다. 북한군이 더 이상 도발을 하지 않아서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는 해소될 수 있었다.

1975년 초, 주한 미국 대사관은 박정희 정부가 프랑스로부터 핵 재처리 기술과 시설을 도입해서 핵무기를 개발할 계획을 갖고 있음을 파악했다. 미 국무부는 아시아 역내에서의 재처리는 핵 확산 위험을 야기한다면서 여러 채널을 통해 이를 포기하도록 우리에게 종용했다. 프랑스 정부에 대해서도 한국과의 계약을 파기하도록 종용했으며, 한국에 캔두형(型) 중수로(重水爐)를 판매하려는 캐나다 정부에는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줄 것을 부탁했다. 캐나다 정부가 우리에게 프랑스와 맺은 재처리 계약을 파기하지 않으면 중수로를 공급할 수 없다고 통보하자 박정희 정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한국 정부가 재처리 계획을 포기하자 키신저는 캐나다 외무장관 앨런 맥이첸에게 캐나다의 조치가 '녹아웃 한방'(knock-out blow)이었다고 좋아했음이 비밀에서 해제된 외교문서로 밝혀졌다.

EC-121 격추와 판문점 도끼 만행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뻔했던 사건이었다. 닉슨 대통령과 포드 대통령이 키신저의 주장을 배척해서 우리는 전쟁을 겪지 않고 인내심을 갖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북한에 대해 매번 강경한 대응을 주문했던 키신저였지만 그는 우리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자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1960~70년대를 제대로 기억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키신저를 마냥 좋게 평가하지 않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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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돈중앙대 명예교수·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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