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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아찔한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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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꺼내 보는 '다시 본다, 고전'이 두 번째 시즌을 엽니다.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 교수이기도 한 진은영 시인과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온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글을 씁니다.
윌리엄 포크너의 대표작 '소리와 분노'(1929)는 거의 모든 고전 목록 상위권에 올라 있지만 가장 읽어 내기 어려운 소설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미국 영어로 쓰인 작품이지만 프랑스에서 먼저 붐이 일었다. 오죽하면 ‘프랑스가 포크너를 만들었다’는 말이 생겨났겠는가. 난해한 영어 소설을 미국 독자는 잘 읽어내지 못했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번역본을 읽으며 열광했던 것이다. 특히 장 폴 사르트르가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고 소개하는 데 앞장섰다.
난해한 작품들이 잘 번역되기만 한다면 오히려 번역본이 쉬울 수 있다. 그 자체로 매우 구체적인 해석이고 역자 주와 해설의 도움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그랬다. 그러나 잘 번역된 한국어 판본은 2013년에야 등장한다. 이전에는 '음향과 분노'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제목부터 오역에 가깝다. 공진호의 정성스러운 번역본이 없었다면 소개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오역 많은 번역본을 권할 수 없다고 영어판을 읽어 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공진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작품의 번역은 실로 불가능해 보이지만’ 문학사에서 워낙 중요한 걸작이라 ‘오랜 세월 축적된 비평연구서들을 참고, 비교하여 최대한 객관적인 해석’을 통해 작가인 ‘포크너가 한글로 글을 썼다면 어떻게 썼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번역했다.
좋은 번역본이라고 해서 말 그대로 쉬운 것은 아니다. 작품의 앞쪽 반 정도는 전통적인 이야기 방식이 아니라 극단적인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 움직이지 않아도 속이 울렁거렸다. 가만히 있는데도 속이 울렁거렸다. 너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 순간 캐디가 문으로 들어섰다. 벤지. 울부짖었다. 노년에 얻은 내 아들 벤저민이 울부짖고 있어. 캐디! 캐디! 나 도망칠 거야.” (필자 번역)
이렇게 표현된 내용을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 문장은 화자의 상태이다. 그 상태가 과거의 울렁증을 불러낸다. 성적인 자극을 받았던 나탈리 아니면 여동생 캐디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울렁증은 다시 캐디를 등장케 한다. 거기에는 벤지가 있다. 지적 장애를 가졌지만 냄새로 사태를 파악하는 능력을 가진 벤지는 집안에 들어선 누나 캐디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채고 울부짖는다. 캐디가 처음 섹스한 날이었다. 그 울부짖음에 아들의 장애를 견디지 못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다시 벤지의 목소리다. 캐디! 캐디! 이번에는 캐디가 말한다. 나 도망칠 거야.
이처럼 분명한 표식도 없이 시제와 화자가 뒤엉킨 문장이 이어진다. 읽어내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필자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여러 번 읽은 뒤’ 등장인물의 성격과 관계를 파악하고 뒤얽힌 사건을 따로 정리해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읽고 나면 읽을 만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부디 그러시기를!).
여기 인용한 부분은 지적인 인물이지만 여동생의 처녀성과 가문의 명예에 집착하는 큰아들 퀜틴의 ‘의식의 흐름’이 담긴 2장의 한 구절이다. 거기에는 뒤죽박죽된 감정과 시간이 엉켜 있을 뿐 아니라 구두점 하나 없이 긴 독백처럼 이어지는 부분도 여러 번 나온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일어난 사건만으로 보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미국 남부의 몰락한 지주 집안이 배경이다. 아버지는 변호사였지만 거의 술에 의지하여 여생을 보내고 있다. 어머니는 자식 넷을 낳았다. 남자애 셋과 여자애 하나인데 둘째 남자아이만 편애할 뿐 아니라, 늘그막에 낳은 벤지가 지적 장애임을 알고 신세한탄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낸다. 집안 살림과 아이들을 돌보는 모든 일은 흑인 하녀 딜지가 도맡아 한다. 벤지는 누나인 캐디가 돌본 적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캐디는 하루빨리 집을 떠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남자관계가 꼬인다. 한 남자를 만나 임신을 하고, 그 상태에서 다른 남자와 서둘러 결혼한다.
바로 그 여동생 캐디를 끔찍이도 사랑했던, 아마 근친상간의 욕망도 가진 것으로 보이는 큰아들 퀜틴은 지적인 인물이지만 결국 그런 집안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다. 한편 캐디는 이혼당한 뒤 낳은 아이를 친정에 맡긴 채 아마도 화류계에 몸담고 살아가면서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지독하게 세속적인 남동생 제이슨에게 돈을 보낸다. 그러나 제이슨은 그 돈을 가로챈다. 그렇다는 것을 눈치챈 캐디의 딸은 그가 모아놓은 돈을 훔쳐 달아난다.
포크너는 이런 ‘사건’들에 대해서 직접 쓰는 것보다 다 읽은 독자가 등장인물 목록과 관계망, 사건의 시간 순서 등을 작성하고 싶게 만드는 현상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한두 번으로 부족하면 세 번 읽고, 그것도 모자라면 한 번 더 읽어 보라고 했다. 작가 입장에서는 이것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서술 방식이라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는 것도 비슷한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버지니아 울프의 간명한 설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어느 날 우리 정신 상태는 어떨까? 시간대가 뒤섞인 과거의 숱한 인상과 사소하면서 환상적인 다양한 인식이 교차할 것이다. 사방에서 무수한 미립자가 억수같이 쏟아져 들어온다. (중략) 이처럼 변화무쌍하고 경계 지을 수 없는 미지의 정신을,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가능한 한 그대로 전달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 소설은 구성부터 수수께끼 같다. 1장은 ‘1928년 4월 7일’이고, 2장은 ‘1910년 6월 2일’이며 3장은 ‘1928년 4월 6일’, 4장은 ‘1928년 4월 8일’이다. 시간의 흐름이 뒤죽박죽이다. 모더니즘에서는 이런 식의 시간 인식이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현재란 상당 부분 과거에 종속되어 있고 미래의 침투를 받으며 끊임없이 과거가 되어가는 순간이다. 엄밀히 말하면 현재란 없다. 현재는 과거로 흘러간 뒤에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만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초월적인 시공간이다. 과거가 뒤섞여 예정된 일이 일어날 뿐이고, 우리 의식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언어는 그 모든 것을 담아내지도 못할 뿐 아니라 혼란스럽게 만드는 원흉이기도 하다. 하나의 관점이나 누군가의 언어는 편견의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그나마 여러 개의 관점을 통해, 과거 여러 시점의 사실들이 뒤섞을 때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 점은 20세기 초 피카소가 주도한 큐비즘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여러 관점이 어우러져 하나의 진실된 모습을 표현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바로 그런 식이다. 소설은 네 사람이 보낸 각각의 하루이다.
1장의 화자는 세 살의 정신연령을 가진 서른세 살짜리 남자다. 이는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적확한 구성이다. 모더니즘이 시작되던 시기에 시인이나 소설가들을 가장 힘들게 만든 것이 ‘언어의 문제’였다. 언어로는 현실이나 개인의 감정과 사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언어는 언어일 뿐이라는 절망이었다. 의식의 흐름 역시 비슷한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 시작된 것이다. 의식의 흐름이 보여주는 현상에 대한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보고 느끼면서 떠오르는 무의식적인 감각을 그대로 다루고자 했다.
그러나 매우 세속적인 인물을 화자로 내세운 3장부터는 ‘전통적인 소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 작가라면 하드보일드한 스타일도 잘 소화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명쾌하다. 훗날 영화 시나리오를 쓰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4장은 아예 전지적인 시점에서 쓰였다. 해석을 독자에게 맡겨두었던 작가가 막판에 등장하여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정리해주는 전통적인 방식이다. 이 소설 한 편에 여러 가지 소설 기법이 망라돼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년의 고독'을 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감상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보르헤스나 카르팡티에와 같은 작가들이 없었어도 글을 쓸 수 있었겠지만, 포크너가 없었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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