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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찍는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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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는 결혼이 늦은 편이었다. 남들이 중년이라 부르는 나이에 신혼 생활을 시작했으니 부부로서의 시간도 그만큼 천천히 갈 줄 알았는데 어느덧 결혼 10주년이 되었다. 원래는 결혼기념일 즈음해서 신혼여행지인 하와이의 호텔에 가서 뒹굴며 게으르게 놀다 오는 게 계획이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뒤로 미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회사를 그만둔 뒤 작가와 글쓰기 강사로 변신하느라 달라진 경제 사정이 첫 번째 문제였고 이런저런 강연과 워크숍 스케줄도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10주년이지만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해 미안해하고 있는 나에게 아내는 색다른 이벤트를 제안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프로필 사진 새로 찍기'였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된 사진작가 한 사람이 '포트레잇 프로젝트'를 기획했으니 그 행사의 첫 번째 신청자가 되어 보자는 것이었다. 그 사진가는 나도 아는 사람으로 연기자 전여빈의 친오빠 전윤영 작가였다. 지난해 무주산골영화제에서 전여빈이 '넥스트 액터'로 선정되었을 때 그 부스에 있는 사진과 동영상들이 꽤 인상적이었는데 그걸 찍은 사람이 바로 전 작가였던 것이다.
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서울 성수동의 대여 스튜디오에서 만난 전윤영 작가는 프로젝트 예고에서 밝힌 대로 사진을 찍기 전 '그 사람에게 내재하고 있는 것들을 포착해 구체화시키고 이미지로 구현해 내기 위해'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고, 우리도 준비해 간 간식을 꺼내며 자유롭게 대화를 시작했다. 전 작가는 프로젝트 첫 손님이라 좀 떨리지만 SNS를 통해 아내와 나의 글을 읽고 있으므로 어떤 걸 좋아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영화와 책, 글에 관심이 많은 사진가였다. 우리는 최근 인상 깊게 보았던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우연과 상상'이나 '드라이브 마이카'의 남다른 스토링텔링에 감탄하며 기획과 표현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신형철 평론가의 책 '인생의 역사' 앞부분에 나오는 글 얘기를 하다가 전 작가도 브레히트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드라마 얘기도 했다. 아내가 전도연 배우의 팬임을 자처하며 그가 출연했던 '일타 스캔들'에서의 아우라에 대해 얘기했더니 전 작가는 전도연 배우는 대사 처리는 물론 도시락 가게 주인으로서 금전등록기 버튼 누르는 동작조차도 리듬감이 다르더라며 한술 더 떴다. 도시락값 카드 결제하는 동작까지 꿰뚫다니 역시 작가의 눈은 날카롭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두 시간이나 수다를 떤 뒤에야 비로소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진관에서 프로필 사진을 찍으면 보통 "살짝 웃어보세요"나 "턱을 당겨보세요" 같은 지시를 받기 마련인데 전 작가는 "아주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이 안에 사랑이 가득 찼다고 상상해 보세요" 같은 엉뚱한 주문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상태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셔터 소리가 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두 사람이 껴안고 깊게 마음을 주고받는 실험도 해 보았다. 이런 우리의 모습은 디지털카메라뿐 아니라 필름 카메라와 폴라로이드(즉석 사진)에도 담겼다. 돈을 많이 낸 것도 아닌데 이렇게 오랜 시간 다채로운 작업을 하는 건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가는 사진만 잘 찍으면 되지 뭐 이렇게 유난을 떠느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자세가 기술자와 예술가의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날 찍은 사진이 SNS에서 엄청난 조회수와 '좋아요'를 기록했던 건 바로 그런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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