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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가도 모를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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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는 먹장구름이 머리 위로 몰려올 때만 해도 그냥 지나가는 녀석이겠거니 했다. 그로부터 채 5분도 안 되어 거센 바람과 함께 굵은 빗줄기가 사선으로 흩뿌리기 시작했다. 재빨리 피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게 뻔했다. 공원 트랙을 천천히 달려 다섯 바퀴째 돌던 나는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가장자리를 따라 전력 질주했다. 묵직한 구름의 모양새로 보건대 잠시 지나가는 비는 아닐 듯했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 비를 피할 수 있는 전통시장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거기까지 가서 천천히 시장 구경하며 비닐우산이라도 살 심산이었다.
이래저래 일진 사나운 날이구나 싶었다. 벌써 4교째 편집이 진행 중인 신간 원고의 제목을 정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원고를 읽다 보면 괜찮은 제목이 떠오르겠지, 두 달 넘게 뭉그적댔건만 이거다 싶은 제목 안은 단 한 개도 생각나지 않았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아무리 늦어도 이번 주말 안에는 표지 작업을 의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밖으로 나가 뜀박질이라도 하다 보면 '유레카!'를 외치는 행운이 찾아올까 싶어 자리 박차고 일어난 길에 예기치 못한 비바람만 맞은 것이다.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시장으로 들어서는데 왁자한 소음이 귓전을 때렸다. 목소리만으로 이미 흥건하게 마신 취객들 간에 싸움이 났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대낮부터 웬 싸움이야, 구시렁대면서도 눈알을 굴리며 다가섰다. 시장 초입 순댓국집 문 앞에서 두 남자가 전력을 다해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로서는 오랜만에 직관하는 쌈박질이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이목이 쏠리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라도 난투극을 벌이는 데는 필시 사유가 있을 터였다. 온갖 내력 있는 욕설이 오가고, 나이 든 남자들이 볼썽사납게 서로의 머리채까지 잡았다. 그런데도 식당 주인이나 주변 사람들은 물끄러미 구경만 했다. 참 야속한 풍경이었다.
"이봐요, 아가씨. 심란할 거 없어요." 아가씨? 넋 놓고 구경하는 나를 누군가 톡 쳤다. 어깻죽지부터 팔목에 이르기까지, 왼팔 전체를 캔버스 삼아 용이며 연꽃이며 다채롭게 문신한 생선가게 주인이 민소매 셔츠 바람으로 웃었다. "저 양반들 저러는 거, 하루 일과의 마무리예요. 저 위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어르신들인데, 비가 올 거 같으니 오늘은 오전 작업만 했나 봐. 저렇게 화끈하게 일과를 끝냈으니 이제 개운한 기분으로 귀가하시겠지." 그가 은근하게 덧붙였다. "오늘 갈치 물이 좋은데, 한두 마리 드릴까?" "네, 한 마리만 손질해 주세요." 무심결에 대답한 뒤 내 시선은 다시 순댓국집 앞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그 짧은 순간에 싸움은 끝나고 둘 중 더 나이 들어 뵈는 남자가 흔들흔들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내 옆에서 우뚝 멈추는 바람에 움찔했는데, 겸연쩍은 듯 웃는 눈매가 의외로 순했다. "다 끝났어요?" 생선가게 주인이 묻자 그이가 대꾸했다. "그 갈치 나도 두 마리 손질해 줘요. 아, 그리고 두 마리 더 토막 내서 저기 저 개***놈한테 던져줘요." 그가 손짓하는 곳에서 육박전 카운터파트너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토막 낸 갈치를 들고 시장을 빠져나오는데 왠지 나 혼자 진 기분이 들었다. 아 놔, 저렇게 화끈해야 하는 건데. 싸움을 구경하는 사이 비가 그친 덕에 비닐우산을 사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내게는 작은 위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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