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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정밀의학 앞 넓디넓은 블루오션

입력
2023.05.19 00: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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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의 첫 문장 중에는 유명한 글들이 많은데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 역시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참 주옥같은 글이 유명하다. 곱씹을수록 작가의 깊은 내공이 느껴지는 명문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문장은 의학 분야에서도 자주 인용되곤 한다.

환자의 수가 적고 (미국은 20만 명 이하, 한국은 2만 명 이하) 그래서 치료는 물론 진단받는 자체도 어려운 질환을 희귀질환이라고 하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희귀질환은 약 7,000종이다. 희귀질환 개별 환자 수는 많지 않더라도 7,000여 종 전체를 아우르면 전체 환자 수는 약 3억 명으로 세계 인구 80억 명의 약 4%에 달하므로 그 가족들까지 포함하면 인구의 10% 이상이 희귀질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들 희귀질환은 십중팔구 유전성 혹은 선천성으로 발병하지만 그 원인이 되는 유전자가 알려진 경우는 많지 않으며 특히나 환자 수가 적다 보니 각 질환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일도 쉽지 않기에 해당 질환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 된다. 이들 희귀질환은 아마도 7,000개 또는 그 이상의 다른 이유로 각각의 해당 원인 유전자에 이상이 발생한 질병들일 것이므로 각각의 원인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데 환자의 규모가 적으니 학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쉽지 않은 일이다.

한편, 희귀질환뿐만 아니라 암처럼 흔한 질병도 실은 하나의 질병이 아니다. 암이란 악성 종양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같지만 각각의 암들은 차이가 존재한다. 갑상선암 초기처럼 상대적으로 순한 암종도 있지만 췌장암처럼 경과가 좋지 않은 암종도 있고, 폐암 중에서도 비소세포폐암이냐 아니냐에 따른 차이도 존재한다. 나아가, 암이 어느 장기에서 발생했고 어떤 병리학적 특징을 가지는가 말고도 어떤 유전자에 이상이 생겨 암이 되었는가를 연구하는 분야가 최근의 중요한 추세이다.

가령 신장암과 백혈병은 전통적으로는 다른 암종이므로 예전 같으면 신장암 약과 백혈병 약은 다른 게 당연할 수 있겠지만, 만일 신장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연구된 원인 유전자가 나중에 백혈병 환자에게서도 발견된다면 신장암 환자용으로 개발되던 표적 항암제를 해당되는 백혈병 환자에게도 사용하는 게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2001년 글리벡(성분명: 이마티닙)이 만성 골수성 백혈병에 대한 치료제로 미국에서 허가받은 이후, 특정한 원인 유전자를 대상으로 작용하여 치료 효과를 기대하는 표적 항암제 개발이 신약 개발의 큰 축을 형성하고 있지만, 문제는 원인 유전자가 규명된 암의 종류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폐암이면 폐암, 뇌종양이면 뇌종양, 병명은 같을지라도 각각의 환자들은 서로 다른 원인 유전자 때문에 암이 발생했을 수 있으며, 실제로는 어떤 유전자가 환자의 발암 원인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훨씬 많다.

결국 암처럼 흔한 질병도 환자 개개인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암이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지금보다 더욱 효과적인 치료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환자 개개인의 발병 원인을 파악하고 치료하는 정밀 의학의 발전이 필요하다. 정밀 의학의 중심에 있는 유전체 기술과 디지털 기술이 강한 우리나라로서는 집중 육성할 가치가 있는 이유이다.


이환석 유전자 라이프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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