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책임·미래, 독일의 강제징용 교훈

입력
2023.05.16 22:00
27면
독일 중부 바트아롤센의 알루미늄 공장 창고에 세 들어 있는 세계 최대 강제징용 등 2차대전 전쟁범죄 기록보관소인 아롤센 아카이브 중앙기록 저장고. 연합뉴스

독일 중부 바트아롤센의 알루미늄 공장 창고에 세 들어 있는 세계 최대 강제징용 등 2차대전 전쟁범죄 기록보관소인 아롤센 아카이브 중앙기록 저장고. 연합뉴스

일본 기시다 총리가 7일부터 1박 2일간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다. 예상한 대로 국가를 대표하여 일제강점기에 가해진 국가 폭력에 대해서는 사죄하지 않았다. 단지 가슴 아픈 과거라고 하며 자신의 미안함을 표했다. 일본 기업들은 해외 강제노동력으로 생산을 확대하여 부를 증대했고, 무기와 보급품을 생산하여 전쟁을 치렀다.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한국 피해자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기업에 보상과 사죄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사죄는커녕 반성도 하지 않았다. 도덕성에 무감각한 이들은 배상 문제가 1965년에 체결되었던 한·일청구권협정에서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맞지 않는다. 일본과 다르게 독일은 나치 폭력에 대해 사죄했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오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는 약 1,200만 명을 강제노동에 동원했다. 1944년 '외국인 투입(Auslaendereinsatz)'이 절정에 달했을 때 600만 명의 민간인 강제노동자가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폴란드와 소련에서 왔다. 이외에도 약 200만 명의 전쟁포로가 독일 산업에서, 50만 명 이상의 강제수용소 수감자가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이들 중 3분의 1이 여성이었고, 납치된 아이들도 있었다.

전쟁 이후 독일에서도 강제노동자들은 '잊힌 희생자'였다. 이들에 대해 뉘른베르크재판에서 책임을 물었지만, 독일 정부와 기업들은 보상을 거부했다. 그러나 화해를 위해 서독은 여러 대기업과 개별 국가에 배상을 시작했다. 1952년 이스라엘(35억 독일 마르크 원조)과 유대인청구회의(Jewish Claims Conference)에 수백만 마르크와 1959~1964년 사이 여러 서유럽 국가에 총 9억 마르크를 지급했다. 2007년까지 98개국의 170만 명이 보상을 받았다.

서독에서 나치 만행과 강제징용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러나 동독은 반파시스트 국가라는 자화상 때문에 외국인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거부했다. 서독 총리 브란트는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봉기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국가를 대표하여 사죄한 것이다. 그동안 독일 일부 국민과 미국의 정치적 압력이 높아지자 1998년 독일 연방하원은 독일 산업계의 재정적 참여를 촉구하면서 강제노동에 대한 보상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2000년 8월에 '기억, 책임 및 미래' 재단이 구축되었다. 2001년 5월에 독일 연방의회는 배상을 결정했다. 박해와 이력에 따라 피해자들은 개별적으로 500유로에서 7,700유로의 일회성 지급금을 받았다. 보상은 2007년 완료되었다.

독일은 나치 폭력을 보상으로 끝내지 않고 공공의 기억으로 되돌리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은 강제징용자인 산증인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기록문서 즉,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해 오고 있다.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도 1945년부터 세워 오면서 1993년 독일 총리 콜이 베를린에 '노이에 바헤' 기념관을 재설계했고, 2005년에 중앙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독일처럼 과거를 생산적으로 극복하는 활동을 일본 정부로부터 기대하기는 어렵다. 양국의 호혜적 관계를 위해 생각을 같이하는 한·일 단체가 함께 현명한 대안을 구상하고 실천하면 어떨까? 시작이 반이라는 격언이 있다.


김해순 유라시아평화통합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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