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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물건 직접 고치고 싶나요? 요구해야 바뀝니다"

입력
2023.05.1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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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째 미국서 '수리권' 운동
수리협회 고든 번 전무 인터뷰

수리할 권리를 시각화한 이미지. 애플 제공

수리할 권리를 시각화한 이미지. 애플 제공


"수리권 보장을 위해 싸우는 건 기업과 전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달 초 화상으로 만난 미국 수리협회의 게이 고든-번 전무이사는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가 세계 각국에서 빠르게 일반화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수리할 권리의 가장 큰 적은 새 제품을 더 많이 팔려는 기업들"이기 때문에, 수리권을 따내려면 그걸 주지 않으려는 기업들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고든-번 이사가 속한 수리협회(The Repair Association)는 2013년 설립된 미국 최대 수리권 옹호 시민단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모든 제품에 대한 수리권을 갖는 것을 목표로, 수리에 친화적인 법률, 정책, 제도를 만들기 위한 운동을 한다. 수리협회에 따르면, 2019년 애플·마이크로소프트 등 25개 미국 기업이 수리권 반대 로비에 지출한 금액은 1억3,600만 달러(약 1,820억 원)였다고 한다. 그만큼 주요 기업들이 큰돈을 써가며 필사적으로 수리권 법안이나 정책에 반대하고 있다는 얘기다.

기업들이 수리권에 반대하는 표면적 이유 중 하나는 '누구나 수리를 하면 기업의 지식재산이 침해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고든-번 이사는 이에 대해 "기업들의 핑계이고, 더 거칠게 말하면 헛소리"라며 "저작권은 저작권법으로 보호되기 때문에 수리와 관련 없는 문제고, 설사 지식재산이 침해될 가능성이 있다 해도 기업은 적응하고 변화할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했다.

이용자 데이터가 유출되는 등 보안 위험성이 커질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근거 없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용자가 자기 데이터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기기를 그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는 것"이라며 "오히려 직접 수리할 권리를 주는 게 데이터를 확실히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반박했다.

미국 수리협회의 게이 고든-번 전무이사. 그는 올해로 10년째 미국에서 수리권 확산을 위한 운동을 하고 있다. 수리협회 제공

미국 수리협회의 게이 고든-번 전무이사. 그는 올해로 10년째 미국에서 수리권 확산을 위한 운동을 하고 있다. 수리협회 제공


미국에선 이달 기준 50개 주 가운데 45개 주에서 수리권 관련 법안이 이미 발효되거나 통과된 상태다. 그러나 이런 성과에도 아직 갈 길이 까마득하다고 고든-번 전무는 말했다. 그는 "수리권의 보장은 갈수록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다"며 "제조사들이 더 많은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소비자와 연결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조사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지원을 중단하는 식으로 기기 교체를 우회적으로 압박한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수리권의 목표인 '고쳐서 오래 쓰기'가 가능해지려면, 기한 없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끝으로 그는 한국 소비자들에게 이 같은 당부를 남겼다. "당신의 물건을 직접 고치고 싶다면, '입'을 이용하기를 추천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국회의원들에게 말하세요."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란 메시지였다.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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