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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는 여자' 아닌 '누드의 예술가'…실험미술 선구자 정강자를 추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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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2016년 미국 미시간주의 한 중학교의 미술사 수업 도중에 미술교사가 ‘질(vagina)’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교사는 미국의 대표 현대미술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을 보여주었고 핵심 주제였던 ‘질’에 대해 언급했다. 학부모들은 해당 교사의 해고를 요구했고 결국 해고되었다. 지난해 10월 미네소타주 햄린대학 에리카 로페스 프레이터 교수는 이슬람 예술사 시간에 보여준 그림 때문에 해고되었다. 이슬람교에서는 예언자의 모습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형상화하거나 보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에 사전에 미리 공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 학생들의 반발이 계속되자 학교 측은 교수를 해고하였다. 이 일은 미술사 연구자들의 큰 반발을 샀다. 미시간대학의 크리스티안 그루버 교수는 “무함마드의 삽화 없이 이슬람 미술을 논한다는 건, 서양미술을 소개하면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보여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항의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지난 3월 플로리다주의 한 초등학교 6학년 서양미술사 시간에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보여줬다는 이유로 수업을 진행했던 교장이 해고되었다. 학부모들로 이루어진 이사회는 “성기가 있는 포르노 같은 나체를 보여주면서 부모들에게 사전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이유라고 밝혔다.
미국은 주마다 상황이 매우 다르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안전한 동성애 성교에 대해 알려주는 지역도 있고,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함부로 공개해서는 안 되는 지역도 있다. 개인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기 때문에 무함마드 그림을 보여줘선 안 되고, 사립재단의 내부 규정을 존중하기 때문에 가톨릭 학교는 임신한 미혼 교사를 해고한다. 한편으로는 문화적 다양성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몇 년 전부터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전쟁(culture war)의 모습이다. ‘정치적 올바름주의’가 진보 또는 보수와 만나면서 충돌과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두고 ‘옳다, 그르다’는 판단을 한국에 사는 우리가 함부로 할 순 없다. 새로운 가치 모색을 위한 충돌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 받고 위축 되는 미술교사들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는 슬픔 같은 것이 차오른다. 예술에서 누드가 금지된다는 것, 나에게는 슬픈 일이다. ‘빌렌도르프 비너스’에서 시작되는 누드의 역사를 떠올리며, 나의 미술 선생님 정강자 화백을 생각한다.
나의 첫 미술 선생님은 대한민국 최초로 누드 포퍼먼스를 선보였던 정강자(1942~2017) 화백이다. 1982년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 4년 동안 나는 정강자 선생님의 화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학교 바로 옆 상가 2층 선생님의 화실은 많은 아이들이 들락거리던 미술학원이자 내 또래의 어린 남매와 함께 사시던 집이었다.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쪼르르 뛰어갔던 그곳에는 늘 물감 냄새가 났다. “아이고, 누가 니 쫓아 오드나?” 하시며 헐떡거리는 내게 얼음을 띄운 옥수수차를 내어 주셨다. 언젠가 어느 일요일, 학교 운동장에서 놀다가 넘어져 코피가 쏟아졌고 나는 곧바로 선생님 화실로 달려갔다. 가족과 함께 쉬시는 휴일이니 함부로 찾아가면 곤란하다는 걸 가늠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나를 꼭 안아 주셨다. 코피를 휴지로 틀어막고 엄마를 기다리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진짜 화가”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았다. 선생님은 큰 캔버스에 그려진 누드를 계속 칠하시며 내게 말씀하셨다. “주영이 니 커서 화가 된다캤나? 그 길이 쉽지 않을긴데.” 그때는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다. 동네 엄마들이 “가수 남일해의 여동생”이라고 하는 말만 들었지, 어떤 예술가였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평생 미술과 관련한 분야에 살게 된 원동력이 되신 분이다.
정강자는 1942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50년대 학창 시절, 모든 여학생들이 장래희망으로 ‘현모양처’를 적을 때, “나의 꿈은 노벨문학상을 받는 작가가 되는 것”이라고 적었던 정강자는 문학 대신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진학하여 예술가의 꿈을 키웠다. 사회고발 의식이 강했던 ‘신전(新展)’의 멤버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1967년 12월, ‘비닐우산과 촛불’이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행위예술에 참여했다. 촛불 꽂은 우산을 찢으며 ‘국립현대미술관 하나 없는 구태의연한 미술계’를 비판했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1968년 6월, 두 번째 행위예술 ‘투명풍선과 누드’는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젊은 여성 정강자가 옷을 벗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제가 애들 미술학원을 했어요. 그때 꼬마들이 불고 다녔던 투명 풍선이 있었는데, 아하 이걸 사용하면 되겠구나 했죠. 그런데 아이고 작품 끝나고 학부모들이 난리 치고 아이들이 전부 학원을 그만둬서 굶어 죽을 뻔했어요.” 그만큼 큰 이슈였다. 쎄시봉 감상실에서 존 케이지의 음악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투명풍선과 누드’는 예술의 고정관념에 항의하는 작품이었다. 당시 풍기문란죄로 정강자를 체포하기 위해 많은 경찰이 왔고, 한국일보 허영환 기자의 도움으로 정강자는 구속을 피할 수 있었다. 같은 해 12월, 정강자는 강국진, 정찬승과 더불어 양화대교 아래에서 ‘한강변의 타살’ 퍼포먼스를 펼쳤다. 당시 미술계와 언론의 냉대와 조롱을 받았지만 50년 후, 2018년 ‘판아시아’ 소속 예술가들이 ‘한강변의 타살’을 재현하면서 한국 미술사에 기록되었다. 문화 사기꾼(사이비 작가), 문화 실명자(문화 공포증자), 문화 기피자(관념론자), 문화 부정축재자(사이비 대가), 문화 보따리장수(정치 작가), 문화 곡예사(시대 편승자) 등을 쓰고 읽고 태우는 화형식을 통해 기성 문화세력을 고발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강국진, 전창승에 비해 여성 정강자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혹독했다.
1964년 미국의 캐롤리 슈니먼은 마네의 ‘올랭피아’를 재현하는 누드 퍼포먼스로 명성을 얻었고, 같은 해 일본의 오노 요코가 ‘조각내기’라는 누드 퍼포먼스로 글로벌 아티스트로 거듭났다. 그러나 1968년 대한민국의 정강자는 선정적인 주간지들의 이슈거리가 되었고 심지어 한 주간지는 그녀를 ‘광녀’라 부르며 ‘발광상’을 수여했다. 전위적 예술그룹 ‘플럭서스’에서 백남준이 미국에서 활동하던 그때, 한국 정부와 문화계는 정강자를 억압했다. 1970년 8월 정강자의 첫 개인전 '무체전'을 정부가 강제 철거하면서 같은 날 수백 명의 장발족을 검거하였다. 정강자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1977년, 먼저 가 있던 남편을 따라 싱가포르로 이주하여 두 아이를 기르면서 붓과 캔버스로 겨우 호흡했다. 그 후 1982년에 귀국하여 반포동에 미술학원을 열고 서서히 미술계 복귀를 준비했다. 내가 정강자 선생님을 만난 시기가 이때였다.
중학교 때부터 선생님을 동네에서 볼 수 없었다. 그때 선생님은 1987년부터 1991년까지 ‘맥도날드가 없는’ 전 세계 45개국 오지를 돌아다니셨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에 기고하면서 작품을 발표하였고, 작품도 잘 팔렸어요. 그런데 새로운 도전이 생기더군요. 여행지 그림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 나만의 것을 해야 하지 않은가 하는. 그때부터 한국적인 것, 나만의 것을 찾기 시작했고, 50대 이후부터 반원의 기하학적 형태로 나의 언어를 찾게 되었죠.” 2014년 11월에 촬영한 구술채록 영상에서 73세의 정강자는 긴 세월 견디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마침내 자신만의 언어를 찾을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2017년 7월 23일,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던 정강자는 우리 곁을 떠났다.
정강자 선생님 작품을 보러 창덕궁 옆 아라리오뮤지엄으로 향했다. 3월 30일부터 9월 3일까지 아라리오뮤지엄에서 정강자 개인전 ‘꿈이여 환상이여 도전이여’가 개최 중이다. 아라리오뮤지엄 전시장의 중앙 홀. 1970, 1980년대 바틱(인도네이사 전통 염색 기법) 작품들이 나를 반겼다. 선생님의 화실에는 갖가지 색상으로 염색된 천들이 많았다. 염색된 큰 손수건을 늘 머리에 두르고 계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작은 방으로 꾸며진 벽면에 걸린 ‘화실’ 작품 앞에 멈춰 섰다. 어린 찬우 옆에서 아기 윤경을 업은 채 붓을 들고 캔버스에 칠하는 모습이다. 선생님의 등 뒤로 학원 아이들의 얼굴이 가득하다. 천천히 작품 가까이 다가서자 그림 속 선생님이 그리는 그림에 64동, 65동, 70동이 보인다.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학교 끝나자마자 뛰어가며 스쳤던 64동, 65동이다. 선생님의 화실, 그러니까 미술학원 바로 앞 풍경이다. 어디선가 물감 냄새, 옥수수차 냄새가 난다. 반포주공아파트의 재개발로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이 거리의 모든 추억이 눈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두 아이를 양쪽 날개에 달고 누드의 여인, 정강자가 날아오른다. 이제 곧 국립현대미술관,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LA 해머뮤지엄에 정강자의 데뷔작 ‘키스 미’(1967년)가 전시될 예정이다. 한국 실험미술의 기수였지만 오랜 기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2000년대가 되어서야 재평가되고 있는 나의 선생님 정강자. 이제는 ‘벗는 여자’가 아닌, ‘누드의 예술가’로 날아오르고 있다.
5월 15일은 60년째 맞이하는 ‘스승의 날’이다. 하지만 ‘스승의 날’은 이제 선생님들에게 ‘곤란한 날’이 되었다. 카네이션 한 송이도 학생 대표가 아닌 일반 학생이 주면 불법이 되는 상황이다. ‘스승의 날’ 폐지 청원이 끊이지 않는다. 앞서 짚어 보았던 미국 ‘문화전쟁’과 유사한 어떤 과도기적 과정의 충돌과 갈등일 것이다. 과거 한때 교사들의 촌지는 분명 해결해야 할 문제였고 그 ‘올바름’으로 나아가기 위한 어떤 불편함일 수 있다. 성적 대상으로 소비되는 여성의 누드는 분명 재고해야 하는 문제지만, 여성 예술가가 자기 정체성을 위해 드러낸 누드조차 금지하는 일도 문제다.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누드 동영상 유포를 금지하면서도, 예술창작의 형식으로서 누드를 함께 감상하는 일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국가가 문화강국이다. ‘스승의 날’은 취소하더라도, 예술가의 누드가 취소되지 않기를, 나의 미술 선생님 정강자를 추모하며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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