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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에 실어보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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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난 오후, 따뜻한 봄 햇살에 몸이 녹을 만큼 노곤하다. 솔직히 이렇게 청명한 날씨라면 무언가 일이라도 생겼으면 하는 바람도 든다. '타다'는 이처럼 때와 분위기의 영향을 쉽게 받고, 그런 변화를 느낄 때 쓰는 말이다. 춘곤증을 두고 과학에서는 낮의 길이가 길어져 활동량이 늘어나고 긴장한 근육이 이완되며 생기는 몸의 적응으로 설명한다. 이를 환경과 분위기에 실린 마음의 변화로 보는 것은 어쩌면 동양인의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한국말에는 여러 뜻의 '타다'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를 말은 버스나 비행기를 타는 것이다. 산 능선을 타고, 도로나 개울을 타는 일처럼 어떤 곳을 따라 지나갈 때도 '타다'라고 한다. 눈에 보이는 길뿐만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말할 '기회를 타는' 일도 있다. 또한, 일한 몫으로 돈이나 상을 받을 때도 '타다'라고 한다.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을 타고, 꾸준히 모은 적금도 탄다. 재주, 소질 그리고 복이나 운명 등 선천적으로 지니게 된 어떤 일에서도 그저 '있다, 있었다'라기보다 '타다, 타고났다'라며 감탄한다.
그러한 말들 가운데 '봄을 탄다'고 할 때의 '타다'는 감정과 느낌을 받는 일을 이른다. 기온의 변화를 유독 심하게 느낄 때도, 몸이나 감정에 영향을 받을 때도 '타다'로 말한다. 추위와 더위를 타고, 간지럼을 타고, 부끄럼이나 노여움을 탄다는 말을 쉬이 듣는다. 어떤 물건은 먼지가 쉽게 타고, 어떤 옷에 때가 탄다고 하는 등 쉽게 달라붙는 성질을 동요하는 감정처럼 표현하는 말도 재미있다. '타다'는 간혹 사람의 손길이 미치는 나쁜 영향도 말한다. 무수한 이들의 손을 타서 반질반질해진 계단 손잡이, 닳아버린 책의 표지, 손을 타 발육이 더뎌진 강아지나, 어른에게 안겨 있으려고만 하는 아기에게도 손을 탔다고 말한다. 사전 속 분류로는 다른 말이더라도, 우리네 삶에서 이들을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는 달랐으나 오늘날 말소리가 같아진 '타다'도 같이 챙겨보자. 슬근슬근 톱질하는 흥부는 '박을 탄다'. 곡류를 갈아 마시는 미숫가루, 아기의 분유처럼 물에 가루를 섞을 때도 '타다'이다. 가야금이나 거문고, 풍금도 '타다'로 말하는데, 오래 쓴 솜을 줄로 튀기어 다시 폭신폭신하게 하는 말도 이와 같다. 솜을 타지 않으면서 이제는 들을 일이 없는 것일까? 시장 이불가게 한쪽 벽에 붙어 있던 '솜 탑니다'란 문구가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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