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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하지 않는 시간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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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쓰는 칸에 기계공학자나 기자, 아나운서 같은 것들을 적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미래의 삶을 직업의 형태로 상상하는 것에 익숙했다. 경찰이나 의사, 소방관 등의 직업을 적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직업을 고른 이유에는 각자의 성향과 선망이 버무려져 있었기에 우리는 갖고 싶은 일자리와 인생 전체를 등치시키는 것에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저 잘 자라서 꿈을 이루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식의 성공적인 삶이 완결된다고 생각했다.
사회 초년생으로 얻은 일자리는 작은 독립 매체의 에디터로, 꿈을 절반 정도는 이뤘다고 볼 만한 것이었다.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현실 노동은 상상했던 것처럼 멋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배울 것들이 많았고, 해보고 싶은 것들도 있었다. 정신없이 일했다. 일에서 모든 희로애락을 찾았고 진이 빠진 채 맞는 약간의 여가는 다음 일을 위한 휴식 시간으로만 사용했다.
그렇게 몇 년간 몸과 마음을 소진하고 나니 번아웃이 왔다. 힘들다거나 이직하고 싶다는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었다. 생계를 위해 일하지만 더 이상 일에서 흥미나 목표를 찾을 수 없었다. 충격적인 건 일상의 동력도 함께 사라졌다는 거였다. 노동의 의미가 사라지니 나의 어느 한 부분도 제대로 정의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뭘 위해 일해 왔는지, 앞으로는 무엇을 위해 일하고 어떤 기준으로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동안 계속해서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주문했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일상에서 택배 박스는 유일하게 확실히 손에 잡히는 기다림의 산물이었다. 취미가 인생을 바꾸었다는 말들에 온갖 취미 클래스를 섭렵하기도 했다. 그러나 짧은 취미들로 공허함을 채울 수는 없었다. 그제야 나는 이제껏 직업인을 제외한, 또는 그보다 상위 개념의 정체성을 수립하거나 일하지 않는 동안의 삶을 사는 법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는 점을 자각했다.
이는 아마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노동 시간의 비율이 특히 높은 한국에서는 노동하는 시간을 최우선순위로 두고 이외의 시간을 모두 여가나 휴식으로 치는 경향이 있다. 삶 속에 노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그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이 존재하는 식이다.
최대 노동시간을 두고 벌어지는 다툼 속에서는 사람이 얼마나 일할 수 있는지만 따질 뿐 일하지 않는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지는 산정하지 않는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어려워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불만에는 학교와 유치원의 교·보육 노동자를 일찍 출근시키거나 늦게 퇴근시켜 아이를 맡아 주겠다는 해결책이 나온다. 부모가 원하는 것은 다른 노동자의 추가 근무에 아이를 수납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확보되는 삶이었을 것임에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노동을 삶의 하위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개인적으로 시도해보고 있는 것은 퇴근 후와 주말을 '쉬는 시간'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다. 노동시간의 대척점을 '일하지 않는 시간'으로 인지하는 것은 정체성의 균형을 맞추는 데 생각보다 많은 도움이 된다. 나는 이 시도가 조금 더 넓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노동시간의 자투리가 아니라, 온전한 '비노동시간'을 확보하는 일에 대한 논의가 깊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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